신약성서의 은총 이해-요한 복음: 생명과 친교(나는 생명을 얻게하려고 왔다(하)

 

요한 복음에서  ‘알다’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대사제의 기도(요한 17, 3)에서 그 종합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대사제의 기도는 성부께 올라가는 순간에 바쳐지고 있다. 죽음-현양-영광이라는 영역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이스 사고방식에서 지식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더욱 더 중요한 가치로 나타난다. 요한 복음이 영지주의적 경향과 전혀 상관없지 않다. 그러나 그 관계 규명에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분명 요한 복음의 ‘인식’에는 구약성서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히브리적 체험의 친밀성이 견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적 측면과 아울러 친교적 측면을 무시하지 못한다. 하느님 아버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되고 친교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을 주는 진리의 성령


        니고데모와의 대화(3, 1-12)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구원이다. 예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상적이고 물질적 세계의 생명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어쩌면 율법학자로서 니고데모가 생각하였을 수도 있는 생각이다. 하느님의 뜻에 상응하는 윤리적 행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생명은 새로운 원리인 성령을 필요로 한다. 신적 생명은 높은 곳으로부터의 출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령의 활동에 귀속되는 출산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생명의 신적 본성을 규정한다. 이러한 출산은 물과 관련된 세례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로부터 – 아래로부터’라는 공간적 대치 개념과 ‘육 – 영’이라는 상반 개념을 통하여 부모로부터의 출생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대조시키고 있다. 신적 실존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에 의해서 작용된 것이다.


        빵의 기적을 전하는 요한 6, 60-71에는 생명을 주는 분이 성령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육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 61-63). 생명과 성령의 관계는 요한 복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예수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도  곳곳에 표현되고 있다. 즉 요한 복음의 삼위일체적 구조를 보여준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이 계시는 만큼 현존하신다. 성령께서는 생명에 대한, 그리고 계시적 활동을 실현하고 내재화 하신다. 물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현존과 분리될 수도 없고 동일시될 수도 없다. 다만 삼위일체적 구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은 “ 상호 안에 거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친밀한 일치이다”.  신적 생명의 은총은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의 내밀한 친교, 사랑에의 참여이다.


        생명이라는 개념은 요한의 은총이론을 총괄하는 한가지 개념이다. 이 초자연적 삶은 자연적인 삶 곁에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받게되는 것이다(요한 3서, 3-4). 포도나무 가지들은 더 풍요로운 열매를 얻기 위해 전지된다(요한 15,2). 때때로 요한과 바울로의 은총이론 사이에 대조가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일치시키는 은총은 삶의 원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선 신적 현존, 즉 성부와 성자의 현존이 암시되어 있다(요한 14,23: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성령도 함께 현존하실 것이다(요한 14, 26; 16, 13). 그와같이 성령의 선물은 그러한 영혼들 안에서 생생한 물의 원천처럼 될 것이다(7, 38-3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 그물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갈구했던 물이다(4,8). 그러나 이러한 은총과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실이다. 그의 수난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결실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이러한 삶은 이미 영원한 삶이다. 선참의 부활이요 시간 속의 영원성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요한 8,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원한 삶이라는 이론을 요한의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의 기적적 현시에서 읽게된다(요한 6, 51-58). 그리고 착한 목자로부터 사랑받는 제자가 들은 “나는 오직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준다.


        아직도 요한 복음의 은총 이론에 관하여 말할 것이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공관복음의 은총 신학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charis라는 단어는 공관 복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루가복음에서만 8번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개념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 복음의 가르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의 신학은 단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긴 주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의 은총 이해를 우리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비록 쓰여진 시기는 늦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원천에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표현과 그 원천을 항상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랑받는 제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에서 은총에 관한 이론을 보여주는 주요 대목은 최후 만찬 후의 담화와 포도나무의 비유이다(요한 15, 1-8).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sine me nihil)”. 이러한 공식은 은총 개념 역사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발전하게 된다. “그분은 나없이 너는 작을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그러한 정황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해준다. 여기에 신비체의 이론 전체가 연루되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초자연적 은총은 보다 높은 삶으로 간주되며 요한 복음 전체에 깔려있다.


        은총은 빛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요한복음사가보다 신앙의 초자연적 성격을 잘 지적한 사람은 없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러한 요한 복음의 진술은 세미펠라지아니즘을 거부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6, 44). 또 요한은 은총을 의인이 죄를 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간주하고 있다(요한 1서 3,6: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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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요한 복음에서  ‘알다’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대사제의 기도(요한 17, 3)에서 그 종합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대사제의 기도는 성부께 올라가는 순간에 바쳐지고 있다. 죽음-현양-영광이라는 영역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이스 사고방식에서 지식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더욱 더 중요한 가치로 나타난다. 요한 복음이 영지주의적 경향과 전혀 상관없지 않다. 그러나 그 관계 규명에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분명 요한 복음의 ‘인식’에는 구약성서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히브리적 체험의 친밀성이 견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적 측면과 아울러 친교적 측면을 무시하지 못한다. 하느님 아버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되고 친교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을 주는 진리의 성령

            니고데모와의 대화(3, 1-12)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구원이다. 예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상적이고 물질적 세계의 생명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어쩌면 율법학자로서 니고데모가 생각하였을 수도 있는 생각이다. 하느님의 뜻에 상응하는 윤리적 행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생명은 새로운 원리인 성령을 필요로 한다. 신적 생명은 높은 곳으로부터의 출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령의 활동에 귀속되는 출산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생명의 신적 본성을 규정한다. 이러한 출산은 물과 관련된 세례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로부터 – 아래로부터’라는 공간적 대치 개념과 ‘육 – 영’이라는 상반 개념을 통하여 부모로부터의 출생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대조시키고 있다. 신적 실존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에 의해서 작용된 것이다.

            빵의 기적을 전하는 요한 6, 60-71에는 생명을 주는 분이 성령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육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 61-63). 생명과 성령의 관계는 요한 복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예수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도  곳곳에 표현되고 있다. 즉 요한 복음의 삼위일체적 구조를 보여준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이 계시는 만큼 현존하신다. 성령께서는 생명에 대한, 그리고 계시적 활동을 실현하고 내재화 하신다. 물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현존과 분리될 수도 없고 동일시될 수도 없다. 다만 삼위일체적 구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은 “ 상호 안에 거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친밀한 일치이다”.  신적 생명의 은총은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의 내밀한 친교, 사랑에의 참여이다.

            생명이라는 개념은 요한의 은총이론을 총괄하는 한가지 개념이다. 이 초자연적 삶은 자연적인 삶 곁에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받게되는 것이다(요한 3서, 3-4). 포도나무 가지들은 더 풍요로운 열매를 얻기 위해 전지된다(요한 15,2). 때때로 요한과 바울로의 은총이론 사이에 대조가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일치시키는 은총은 삶의 원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선 신적 현존, 즉 성부와 성자의 현존이 암시되어 있다(요한 14,23: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성령도 함께 현존하실 것이다(요한 14, 26; 16, 13). 그와같이 성령의 선물은 그러한 영혼들 안에서 생생한 물의 원천처럼 될 것이다(7, 38-3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 그물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갈구했던 물이다(4,8). 그러나 이러한 은총과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실이다. 그의 수난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결실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이러한 삶은 이미 영원한 삶이다. 선참의 부활이요 시간 속의 영원성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요한 8,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원한 삶이라는 이론을 요한의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의 기적적 현시에서 읽게된다(요한 6, 51-58). 그리고 착한 목자로부터 사랑받는 제자가 들은 “나는 오직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준다.

            아직도 요한 복음의 은총 이론에 관하여 말할 것이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공관복음의 은총 신학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charis라는 단어는 공관 복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루가복음에서만 8번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개념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 복음의 가르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의 신학은 단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긴 주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의 은총 이해를 우리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비록 쓰여진 시기는 늦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원천에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표현과 그 원천을 항상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랑받는 제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에서 은총에 관한 이론을 보여주는 주요 대목은 최후 만찬 후의 담화와 포도나무의 비유이다(요한 15, 1-8).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sine me nihil)”. 이러한 공식은 은총 개념 역사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발전하게 된다. “그분은 나없이 너는 작을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그러한 정황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해준다. 여기에 신비체의 이론 전체가 연루되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초자연적 은총은 보다 높은 삶으로 간주되며 요한 복음 전체에 깔려있다.

            은총은 빛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요한복음사가보다 신앙의 초자연적 성격을 잘 지적한 사람은 없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러한 요한 복음의 진술은 세미펠라지아니즘을 거부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6, 44). 또 요한은 은총을 의인이 죄를 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간주하고 있다(요한 1서 3,6: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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