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사목서간들
사목서간들은 사도 바울로의 가장 소중한 이론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신앙에 의한 의화(2 티모 1, 9; 티도 3, 5), 하느님의 자비(1 티모 1, 12-16; 2 티모 1, 9; 티도 1, 1). 세례로 받은 성령의 선물(티도 3, 5-6), 영원한 축복에 대한 희망(1 티모 4, 10; 티도 1, 2; 3,7).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요청(1 티모 6, 3-11) 등이다. 더더욱 그는 마지막 날까지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적 자유의 진정한 개념에 대한 가르침이 오해될 수 있는 점이 흠으로 보여질 뿐이다. 사도 바울로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1 티모 1, 20; 2, 티모 2, 17-18). 신학은 사도 바울로가 사도적 기도를 위해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료로 되돌아 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1 티모 2, 4). 그러나 보편 우주는 아직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나이든 사도는 그가 살았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영적 풍요로움 속으로 관통하려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성령은 그 안에서 일하셨고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게 하였으며( 2 티모 1, 11; 참조 에페 3, 4), 이제 이 성령은 그를 그의 상급을 받으러 가도록 재촉하신다(2 티모 4, 8). 그는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였다( 2티모 2, 9). 그리고 그는 그분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다( 2티모 1, 12 – 2, 11). 그러니 어떻게 그가 그분과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겠는가?(2 티모 2, 11) 사목서한의 음조는 상당히 바뀌어 있다. 그러나 바울로의 이론은 바뀌지 않고 있다. 사랑의 계율은 항상 율법의 끝(완성)이라는 것은 남아있다(1 티모 1, 5; 4, 12; 6, 11; 2 티모 2, 22). 사도 바울로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사랑의 계율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의 황혼에 다시한번 코린도서에서 그가 설교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았던 나를 여러분은 본받으십시오”(1 코린 11, 1).
요약: 바울로에게서 은총의 의미
오랜세기 동안 바울로의 이론을 바탕으로 논쟁해왔다. 이단 신학자들, 가톨릭 교의에 반대자들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바울로의 고유한 사상에서 중요한 점들을 고립시켰다. 펠라지오와의 논쟁 중에도 양편 모두가 바울로의 문헌으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폈다. 16세기 의화 논쟁을 출발점으로 신학자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에 대하여 엄밀하게 작업을 추진하였다. 얀세니즘은 보편적 구원의지를 거부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이에 대해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1 티모 2, 4)는 말씀을 내세웠다. 오늘날까지도 역사적으로 한조건지워진 이러한 종류의 논쟁을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은총에 관한 바울로의 신학을 기관적 체계로 종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우리는 바울로의 주제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오랜 세기동안 우리는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점차적으로 사도 방룰로와 요한의 이론들의 권위적 표현들을 종합하여 묘사한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이러한 작업이 계시된 메시지 자체의 그 풍요로움을 다 이끌어낼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이스 교부로부터 아우구스티노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노에서 토마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토마스에서부터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이끌어 낸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에게서 같은 이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점차적으로 전승의 생생한 연결 안에서 계시된 메시지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다. “ 티모테오, 그대가 맡은 것을 잘 간수하시오”(1 티모 6, 20). 이 장을 끝맺기 전에 사도 바울로의 은총 grace의 단어의 의미를 간단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날마다의 설교 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방인들 작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단어였다. 예컨대 철학가 필로에게서도 발견된다. 주석서나 신비 종교 안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이 단어를 고유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신학적 의미의 은총을 지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도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특벽히 구원의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종교적 의미도 이방인들이 사용한 것과는 철저하게 변형된 것이다. 은총은 기쁨이요 기쁨의 원천이다. 초자연적 호의요 자비이다(로마 11, 6; 에페 2, 6-7).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적 특권이며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에페 2, 4-7). 이와같은 전적으로 무상의 선물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에페 1, 7-8). 강하게 힘을 주고 위로하는 것이다(로마 1, 11-12). 평화를 가져다 주고 놀랍도록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로마 5, 1; 2 코린 9, 8). 그런까닭에 은총은 결코 헛되지 않다( 2 코린 6, 1).
인간을 돕고 율법을 지키도록 능력을 주는 창조적 선물, 치유적 은총이 사도 바울로에게서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이러한 신적 도움을 은총으로 부르고 있지 않다(예를 들면 2 코린 3, 4-5). 사실 그는 은총이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어떤 것에 붙이고 있다. 예건대 의연금과 관련시키기도 한다(2 코린 8, 1). 사실 자발적인 자선은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2 코린 9, 14).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필요에 따라서 구원자 자신을 은총과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선물의 웅장함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티도 2, 11). 하느님의 은총은 단지 윤리적 행위의 원리만이 아니라 성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기서 바울로는 창조된 선물보다는 성령의 선물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로마 5, 5). 그와같이 때로 신학을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필연적 구분의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요한 복음 사가에게서 항존적 은총(habitual grace)은 신적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사상 뒷면에 가리워져 있다. 더욱이 후기 신학자들에게서는 두가지 개념으로 점점 분리되어 갔다. 마침내 오해의 위험에로 치닫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요한 복음사가에세거 의화된 초자연적 삶과 영원한 삶의 관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개념은 사도 바울로에게도 친숙하다. 그러나 은총과 영광 사이의 관계는 언어 자체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더욱 상세한 윤곽을 찾고자 하면 그는 사도 바울로에게서 charis라는 단어를 위한 수많은 의미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이 모든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들로 나타나고 일반적인 사상은 초자연적 은총이라는 것만을 알아듣게 될 것이다. 용어의 이러한 한정적 의미는 훗날 신학에서 사도의 이론에 불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와 프로테스탄은 그로부터 이탈하였다. 의화의 법정적이고 존재론적 개념에 반대하면서. 사도 바울로에게 의화는 죄의 용서, 노예상태에서의 해방, 정화의 그리고 법정적 승인과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영광 부활을 가져다 주 정화의 승인이다. 사실 의화는 이것보다 더 큰 빅딜이다. 그것은 내적 새로움이다. 그 새로움은 의화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그들을 아버지 하느님의 입양된 아들이 되게 한다. 그들 안에 현존하는 성령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구성원이 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특별히 그리이스 교부들에게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4.3.8. 사목서간들
사목서간들은 사도 바울로의 가장 소중한 이론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신앙에 의한 의화(2 티모 1, 9; 티도 3, 5), 하느님의 자비(1 티모 1, 12-16; 2 티모 1, 9; 티도 1, 1). 세례로 받은 성령의 선물(티도 3, 5-6), 영원한 축복에 대한 희망(1 티모 4, 10; 티도 1, 2; 3,7).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요청(1 티모 6, 3-11) 등이다. 더더욱 그는 마지막 날까지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적 자유의 진정한 개념에 대한 가르침이 오해될 수 있는 점이 흠으로 보여질 뿐이다. 사도 바울로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1 티모 1, 20; 2, 티모 2, 17-18). 신학은 사도 바울로가 사도적 기도를 위해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료로 되돌아 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1 티모 2, 4). 그러나 보편 우주는 아직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나이든 사도는 그가 살았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영적 풍요로움 속으로 관통하려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성령은 그 안에서 일하셨고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게 하였으며( 2 티모 1, 11; 참조 에페 3, 4), 이제 이 성령은 그를 그의 상급을 받으러 가도록 재촉하신다(2 티모 4, 8). 그는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였다( 2티모 2, 9). 그리고 그는 그분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다( 2티모 1, 12 – 2, 11). 그러니 어떻게 그가 그분과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겠는가?(2 티모 2, 11) 사목서한의 음조는 상당히 바뀌어 있다. 그러나 바울로의 이론은 바뀌지 않고 있다. 사랑의 계율은 항상 율법의 끝(완성)이라는 것은 남아있다(1 티모 1, 5; 4, 12; 6, 11; 2 티모 2, 22). 사도 바울로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사랑의 계율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의 황혼에 다시한번 코린도서에서 그가 설교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았던 나를 여러분은 본받으십시오”(1 코린 11, 1).
요약: 바울로에게서 은총의 의미
오랜세기 동안 바울로의 이론을 바탕으로 논쟁해왔다. 이단 신학자들, 가톨릭 교의에 반대자들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바울로의 고유한 사상에서 중요한 점들을 고립시켰다. 펠라지오와의 논쟁 중에도 양편 모두가 바울로의 문헌으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폈다. 16세기 의화 논쟁을 출발점으로 신학자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에 대하여 엄밀하게 작업을 추진하였다. 얀세니즘은 보편적 구원의지를 거부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이에 대해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1 티모 2, 4)는 말씀을 내세웠다. 오늘날까지도 역사적으로 한조건지워진 이러한 종류의 논쟁을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은총에 관한 바울로의 신학을 기관적 체계로 종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우리는 바울로의 주제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오랜 세기동안 우리는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점차적으로 사도 방룰로와 요한의 이론들의 권위적 표현들을 종합하여 묘사한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이러한 작업이 계시된 메시지 자체의 그 풍요로움을 다 이끌어낼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이스 교부로부터 아우구스티노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노에서 토마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토마스에서부터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이끌어 낸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에게서 같은 이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점차적으로 전승의 생생한 연결 안에서 계시된 메시지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다. “ 티모테오, 그대가 맡은 것을 잘 간수하시오”(1 티모 6, 20). 이 장을 끝맺기 전에 사도 바울로의 은총 grace의 단어의 의미를 간단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날마다의 설교 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방인들 작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단어였다. 예컨대 철학가 필로에게서도 발견된다. 주석서나 신비 종교 안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이 단어를 고유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신학적 의미의 은총을 지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도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특벽히 구원의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종교적 의미도 이방인들이 사용한 것과는 철저하게 변형된 것이다. 은총은 기쁨이요 기쁨의 원천이다. 초자연적 호의요 자비이다(로마 11, 6; 에페 2, 6-7).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적 특권이며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에페 2, 4-7). 이와같은 전적으로 무상의 선물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에페 1, 7-8). 강하게 힘을 주고 위로하는 것이다(로마 1, 11-12). 평화를 가져다 주고 놀랍도록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로마 5, 1; 2 코린 9, 8). 그런까닭에 은총은 결코 헛되지 않다( 2 코린 6, 1).
인간을 돕고 율법을 지키도록 능력을 주는 창조적 선물, 치유적 은총이 사도 바울로에게서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이러한 신적 도움을 은총으로 부르고 있지 않다(예를 들면 2 코린 3, 4-5). 사실 그는 은총이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어떤 것에 붙이고 있다. 예건대 의연금과 관련시키기도 한다(2 코린 8, 1). 사실 자발적인 자선은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2 코린 9, 14).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필요에 따라서 구원자 자신을 은총과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선물의 웅장함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티도 2, 11). 하느님의 은총은 단지 윤리적 행위의 원리만이 아니라 성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기서 바울로는 창조된 선물보다는 성령의 선물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로마 5, 5). 그와같이 때로 신학을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필연적 구분의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요한 복음 사가에게서 항존적 은총(habitual grace)은 신적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사상 뒷면에 가리워져 있다. 더욱이 후기 신학자들에게서는 두가지 개념으로 점점 분리되어 갔다. 마침내 오해의 위험에로 치닫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요한 복음사가에세거 의화된 초자연적 삶과 영원한 삶의 관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개념은 사도 바울로에게도 친숙하다. 그러나 은총과 영광 사이의 관계는 언어 자체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더욱 상세한 윤곽을 찾고자 하면 그는 사도 바울로에게서 charis라는 단어를 위한 수많은 의미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이 모든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들로 나타나고 일반적인 사상은 초자연적 은총이라는 것만을 알아듣게 될 것이다. 용어의 이러한 한정적 의미는 훗날 신학에서 사도의 이론에 불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와 프로테스탄은 그로부터 이탈하였다. 의화의 법정적이고 존재론적 개념에 반대하면서. 사도 바울로에게 의화는 죄의 용서, 노예상태에서의 해방, 정화의 그리고 법정적 승인과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영광 부활을 가져다 주 정화의 승인이다. 사실 의화는 이것보다 더 큰 빅딜이다. 그것은 내적 새로움이다. 그 새로움은 의화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그들을 아버지 하느님의 입양된 아들이 되게 한다. 그들 안에 현존하는 성령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구성원이 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특별히 그리이스 교부들에게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