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이해의 역사적 개관-스콜라 학파(본성과 은총)

 

5.6.2 본성과 은총


        13세기 스콜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지만, 그의 본성 개념과도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본성은 한 존재자의 본질로서, 한 존재자가 자신을 성취하게 되는 선험적 테두리이다. 본질이 존재와 상관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존재론을 이어받기는 하지만, 인간은 완결되어 있는, 고정되어 있는 본질 구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한계없는 개방성을 통하여 정의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여 자신을 초극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신비이다. 인간 본성이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 개방되어 있고, 그를 향하여 정향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은 하느님에 의하여 은총을 힘입어 자신을 넘어 자신의 충만함을 발견한다. 인간 본성의 완성은 충만한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물론 초자연적인 것은 본성 상부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 은총과 본성을 이층부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초자연적 은총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 안에서 완성에 이른다.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Gratia suppnit naturam et perficit illam)“.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인간의 단 하나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친교이다. 인간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하느님께로의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이 하느님과 관련성을 지니게 한다. 즉 인간의 무한성의 열망이 마침내 지복을 가져 오는 하느님의 관상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인간 본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로 열려있고, 정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 본성은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자신을 넘어 자신의 충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 목표를 향하여 있지만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하느님의 선사되는 은총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초자연적 은총을 통해서만 인간이 그 무한한 충만에 대한 동경을 진정할 수 있다면 그 은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당연히 은총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는가? 토마스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자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자연적 갈망이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요청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은총에의 이 갈망이 바로 은총의 전제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인간본성이 완성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 본성을 당신 자신의 전제로 세우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 의지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토마스 이후 근세에 이르러 본성개념은 토마스와 달랐다. 근세의 본성개념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각되지 않고 인간이 독자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성은 자체 안에 폐쇄된 의의 조직으로 간주되고, 은총이란 자체로 폐쇄된 본성에 첨가되는 어떤 부가물로 간주될 위험, 즉 은총은 본성에 덧쌓아진 이층부로 이해되면서 문제가 야기된다. 즉 은총은 있어도 없어도 좋을 부가물이라는 과소평가가 이루어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자들이 인본주의,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무력성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다시 들고 일어났다는 데서 문제가 발단되었다. 은총없이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하다면 은총이란 인간에게 필연적인 조건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총이 하느님의 자유스러운 선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 교도권이 은총의 철저한 비채무성과 자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서 은총이란 인간의 본질에 점유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교회는 종교개혁자들, 16세기 바유스를 비롯한 루벵신학자들, 17세기의 얀세니즘을 거부하였다.


        17세기 스콜라 신학은 이중 질서론을 계발하였다. 한편으로는 순수한 인간 본성이 있다. 이 본성 안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이 소여되어 있다. 이 본성의 힘으로 인간은 자연적인 행복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선사되는 은총의 질서가 있다. 이 은총으로 인간은 초자연적 목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정향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이중질서에 관하여 19세기 신학자 쉐벤(Matthias Joseph Sccheeben)은 “우리의 정신적 활동성에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면서 서로 공통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두 개의 질서가 포개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동시대의 신학자 스투플러(Johann Baptist Stufler)는 “인간 본성이 자체로 폐쇄되고 기존적인 것이 아니라면, 은총은 부채이고, 은총이기를 그친다. 자체로 보아서 인간 본성은 은총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은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은총에 대해서 무관하고 중립적으로 처신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본성과 은총의 두 질서는 자체로 존속한다는 것이다. 은총이란 인간 본성에 순전히 외적으로 첨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3세기의 토마스의 은총 이론과 엄청나게 거리가 멀다. 토마스에게는 두 개의 인간 질서와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목표인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은총으로 인간에게 선사할 때에만 가능한 하느님과의 일치가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그 목표를 향하여 행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요청하고, 본성적인 인간 능력들을 포착하여 인간을 충만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기 스콜라 신학에서부터 은총과 본성이 상대적이고, 비유대적이고, 이층부의 이중 질서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구조에서는 은총이란 인간에게 더 높은 질서를 위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필요할 뿐. 인간을 위해서는 있어도 없어도 좋을 장식품에 불과한 것으로 계산된다.


        오늘날 토마스의 입장을 다시 점검하며 은총과 본성의 관계를 새롭게 인격적인 사고 지평 안에서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모든 인간을 당신과의 긴밀한 일치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구원의지’는 인간에게 외적 훈령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에게서 인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영향을 발휘한다. 창조적인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인간 실존의 실재가 된다. 인간은 본연의 의미에서 초자연적 은총에로의 소명을 지니고 있고, 은총에 의해 불림받은 소명자이다.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에 둘러쌓여 있고 내적으로 각인되어 있지 않은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언제나 이미 은총의 질서 속에 서 있다. 인간히 하느님을 동경하면 이 동경이 벌써 은총의 첫 열매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한테서의 인간의 충만이 당연한 것으로 요청되지 않고 선물로서 기대되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적 삶 안에서 인간은 사랑을 향하고 있으며, 사랑을 통해서만 존재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사랑을 권리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로운 선물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선물로 머물 때에만 가능하다. 결국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은총은 인간에게 당연한 권리로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 아닐 때 이미 은총이 아니다.


        은총과 본성을 구별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재 속에서 두 개의 질서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본성은 은총을 치향하며, 은총을 통해서 자신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구체적인 인간이란 언제나 이미 은총에 이끌려 사랑하며,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불리움을 받고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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