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펠라지아니즘:구원 의지와 신앙의 시작-아르스의 체사리오와 오랑제 공의회

 

9.4. 아르스의 체사리오와 오랑제 공의회


그 논쟁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원천으로부터 얻게 되었다. 세미펠라지안 논쟁은 6-7년 후에 종결되었다. 여기에는 아르스의 체사리오가 공헌하였다. 529년 오랑제 공의회에서 체사리오는 세미펠라지아니즘적 반대 의견을 굴복시켰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진정한 사상을 승인하였다. 은총에 관한한 인간의 본질적 독립성은 비록 구원의 시작을 위한 것일지라도 신앙의 교의가 되었다.


        세미펠라지아니즘을 거슬러서 오랑제 공의회는 두가지 부류로 인간을 나누는 것을 거부하였다. 즉 한 부류는 끊임없는 은총의 결과로 구원에 이르게 되고, 다른 한 부류는 자유 의지로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구별을 거부하였다. 은총은 자유를 앞서고 끊임없이 인간 자유와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인간의 의지와 행위는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은총의 끊임없는 행위없이 어느 누구도 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와 바울로의 이론은 이제 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역시 아우구스티니즘의 예정적 해석을 거스르는 indiculus를 명백하게 표준으로 세워놓았다. 어떤 영혼은 악에로 예정되었다는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얀세니우스 역시 나중에 단죄되었다. 공의회는 의로운 사람은 항상 항구하기 위해서 은총을 필요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랑제 공의회는 그처럼 은총 이론과 교의 역사를 위해 매우 중요한 문헌을 남기고 있다. 그 공의회는 체사리오를 포함하여 단지 14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작은 지방 공의회였다. 그러나 체사리오의 노력으로 오랑제 공의회는 로마로부터 승인받았다.


        이 중요한 문헌의 해석은 미묘한 문제였다. 그 텍스트 안에 담고 있는 단죄에 주어진 가치적 효과와 관련된 역사적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때까지 오랑제 공의회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지 혹은 Valence 공의회 즉 체사리오 적대자가 되고 있는 그 공의회를 따라갈지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오랑제의 선언들은 세가지 부류로 구별된다. 1) 펠라지아니즘을 다시금 단죄하는 8가지 단죄 조항, 2)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영감받은 7가지 규정, 3) 신앙고백이다. 세 번째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규정에 관해서는 17세기까지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우구스티노의 문헌에서 취하게 된 것임을 인식하엿다.  약간 Prosper의 수정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단죄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17세기 Trier에서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capitula sancti Augustini in urbe Romae transmissa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문헌에 포함된 것은 19가지 단죄이다. 그 가운데 8가지는 오랑제 공의회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Paul Lejay작품 이래로 일반적 해석으로 발아들여졌다. 19개의 장은 체사리우스에 의해 로마에 보내진 자료들을 복사하고 있다. 그의 대답에서 교황 펠릭스 IV는, 그 일을 마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단지 capitula의  8가지만 담고 있다. 그 단죄들은 예정과 재 승인에 관련된 단죄들은 제거되었고, 16개 입장은 Prosper의 작품으로부터 제안된 것이고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이 인용되어 첨가된 것이다. 체사리오는 그것을 다양한 점에 대해서 교황정 문헌을 첨삭하고 규정과 신앙 고백을 첨가하였다. 그는 오랑제 공의회에와 마침내 로마 공의회에서 승인을 위한 문헌을 제출하였다.


        Dom Cappuyns는 다른 해석을 제안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헌 전체가 로마의 원본이라는 것이다. 그 단죄조항 자체는 오랑제 공의회 문헌 처럼 로마 고서문헌고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교회 문헌”들로부터 채록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죄조항은 오랑제 공의회보다 앞선 초기 공의회로부터 오고 Scythian 수도회의 한 사람인 John Maxentius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단죄조항의 형식은 si quis 등등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오해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제 3단계의 신학자들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Cappuyns의 분석에 의하면 로마가 이 문헌을 오랑제에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신앙 고백은 체사리오에 의해서 첨가된 것이며 Bonficace II에 의해서 승인된 주교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교의 역사가들은 오랑제 텍스트의 정확한 원본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 텍스드에서 강조하고 있는 주요점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은총은 구원 혹은 회개의 과정 바로 그 출발점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와같이 아우구스티니즘은 또다른 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정에 관한 문제가 예민하였다. 그러나 서구 신학은 결과적으로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의 이론을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정은 다른 방법에서 조정될 것이다.


        상당히 나중에 유명론자들과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신학자들은 펠라지안과 세미펠라지안을 거슬러 그 문헌의 해석을 갖게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두가지 오류, 은총을 상승하기 위하여 거부하는 가운데 구성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확실히 아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의 자유 의지에 영향을 준 상처를 강조하였다. 그 13세기의 대신학자들은 사상의 아우구스티노적 노선을 따랐던 사람들일 것이다. 신화하는 은총의 개념이 발전하는 동안 그들은 역시 그 은총의 치유적 성격을 강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아우구스티노의 아우구스티니즘이 이러한 사상가들의 신학적 요약 안에서 다시한번 살아 나왔는가를 보기 전에 19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예정주의자들의 위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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