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 의화론의 현대 신학적 문제점
의화론이 그리스도교를 분열시킨 주 쟁점이었고,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의화론은 그리스도 구원 복음의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일치해서 가르치는 교리이다. 그러나 의화론은 오늘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이미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되었고 초자연적으로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은총은 인간의 활동이나 선행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가? 소외된 실재 속에서 인간 이하의 조건하에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객관적 구원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교회는 이러한 질문에 만족한 대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우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화론이 인간의 선행이나 활동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지 못하는 의화는 참된 의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값싸게 주어진 은총은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상상의 은총일 뿐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을 자유롭게하면서 인간의 삶을 바로 잡아준다. 의화는 행동을 마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극한다. 행위는 인간이 참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장소를 전제한다. 이 장소 안에서 일단 받아들여진 사람은 자유로이 그리고 독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인간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책임지도록 성숙시킨다. 이러한 성숙과정을 성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의화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본다. 자신과 자신의 원의, 근심, 걱정 등과 적나라한 대질을 보속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앙과 보속은 동일한 사건의 양면이다. 신앙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거절, 포기, 보속을 포함한다. 이렇게 헌신과 거절의 과정은 삶 속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참된 의화 속에서 인간은 자기 만족으로부터 벗어나, 헌신적인 생활로 옮겨진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태가 기만 당하지 않기 위해 의화된 인간에게는 명심해야할 규범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되고, 십계명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의지이다. 이 규범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가를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을 긍정하고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을 신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의화는 그리스도가 죄인 인간에게 떨어진 판결을 대신해서 짊어졌다는 데에 근거한다. 그런데 제3자가 한 인간을 죽음속에서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대신 또는 대리는 인간 공동생활에서 필수적 과정이다. 각자 자신의 행위와 함게 자신이 생활하는 공동체에 휘말리고 타자들의 행위에 가담한다. 경제생활에서의 역할 분담, 직업의 다양성은 이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각자 능력을 갖고 자신의 위치에서 타자를 위해서 일하면서, 동시에 타자의 직업에 의존하고 있다. 과실의 경우에도 대리, 대신이 있다. 모두가 탓이 있는 전쟁이나 재앙의 결과를 한 백성의 일부가 치루어야 한다. 전 공동체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특별한 양식으로 전체를 위해 있는 개별적 구성원들에게만 해당된다. 과실은 개개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늘 전체와 상관이 있고, 전체가 있는 곳에 대신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곤란한 처지에서 타인을 대신하여 무서운 결과, 죽음까지도 짊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예수는 한 인격성 안에서 인간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대신한다. 물론 이점은 인간 공동 생활로부터의 모든 비교를 초월한다. 이렇게 인간의 과정으로서의 대신의 배경 뒤에서 예수를 통한 대신의 유일 무이성이 밝혀진다.
하느님이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통해서 구원하셨다면, 기존하는 엄연한 소외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생활한다. 내가 이 시대에, 이 장소에, 이 부모를 지니고 남자나 혹은 여자의 특정된 영역만을 지니고 있다.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미래를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견하지 못한다. 각자 어두운 죽음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소여된 생활 조건들과 부딛치는데 여러 가능성들이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을 거슬러 싸울 수 있고, 이 앞에서 포기를 하고 용기를 잃고 체념할 수 있고, 의식적으로 소여된 실재 조건에 자신을 내맡기고 조건을 인정할 수 있다. 이 후자를 신앙인의 처신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인은 현 존재의 조건이면서 자신이 점유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을 점유하는 힘, 하느님의 실재를 느낀다. 우리가 어떻게 현 존재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은 오로지 타자로부터 받아들여짐을 통해서만 현 존재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다. 타인을 통한 수용을 체험한 인간만이 자신의 전체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자기 존재의 심층에서부터 무조건적 수용과 인정, 이해, 용서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받아들였음을 천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공동체로 이끌어지는 속에서, 상호 수용의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신자들이 공동체를 통해서 즉 인간들을 통해서 인간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하느님의 수용이 매개된다.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동경은 하느님이 인간을 긍정하고 당신과의 공동체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진정시킬 수 있다. 자신이 일단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있는 자는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음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잘하고 못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적이 된다.
하느님의 의화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은 인간들의 판단과 견해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그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졌음을 인식할 때 자유로우면서도 책임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은총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선사되고 인간 존재를 내적으로 쇄신하는 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의화은총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역사에 뒤따르는 주관적 내적 작용으로 이해되어 신학적 사유 관심은 각 개인의 자유에로의 해방에 대한 문제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시 고립된 상태 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여건하에서 생활하는 실존자이다. 그리고 실존 성취의 지평으로서 세계 사회는 소외되어 있다. 실제로 인간은 부조리하고 부자유스러운 사회의 조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자유스러운 조건 하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지? 증오와 비정의 강압 속에서 사랑과 봉사가 가능한지? 폭력에 폭력으로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개방되어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간이 진실로 자유스럽기 위해서는 실재 자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매개시키는 질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주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