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죄론
제 1부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첫 단계에서는 죄악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죄악에 관한 어휘를 분석해 보면 죄악의 개념의 이용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이용 가치와 함께 죄악을 표현하는 상징들도 알아볼 수 있다. 죄악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면서도 사회인들이 죄악을 기묘히 이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와 교회 생활을 살펴보면 죄악 개념 역시 여러 가지 기능을 맡고 있으며, 죄악이 세계 각 문화에서 이용되는 상징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각자가 죄악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태도를 통해서 죄책감(죄상감)과 죄의식을 구별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본 죄 못지않게 남의 눈으로 본 죄를 살펴보아야 한다. 남의 죄를 보는 타인이 죄악을 재해석함으로써 나의 죄의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둘째 단계로 성서와 교회 전통을 살펴보면서 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죄 개념을 다듬어 놓고 우리가 구체적인 죄 즉 인류의 운명과 관계되는 죄를 알아보겠다. 현대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성서가 소개하는 “세상의 죄”를 연구한 다음에 각자가 태어날 때 은총 결핍 상태라고 볼 수 있는 원죄를 연구하겠다. 마지막 단계에서 기원죄 즉 첫 인간이 범했다는 죄까지 소급하여 살펴보겠다. 교회가 죄를 이렇게 구별함으로써 죄의 역사성, 보편성과 연대성을 가르칠 수 있다. 방법상 우리가 전통적인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즉 아담의 죄에서부터 원죄를 거쳐서 각 개인의 본죄를 말하기보다도 세상의 죄, 원죄, 기원죄의 순서로 “죄악의 신비(2데살 2, 7)”를 연구 하겠다. 이렇게 순서를 뒤바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역할을 드러낼 수 있다. 죄를 범하지 않은 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어 누구보다도 죄의 악성을 말씀해 주셨고 죄의 범위를 드러내셨다. 죄가 없는 데도 인간이시고, 죄가 없기 때문에 참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인간의 구성 요소가 아님을 보여 주셨고 죄에서 구제해 주셨다.
1. 죄악에 대한 경험
먼저 죄악에 대한 경험을 분석하기 전에 어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죄악이란 말을 광범위하게 알아듣겠는 데 이는 인간의 책임이 있고 없든 간에 우리를 괴롭히는 악으로 이해하겠다. 악행이란 말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겠고 죄란 말은 전통에 따라 아쉬운 대로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의미로 국한시키겠다.
1.1. 죄악을 가리키는 어휘 분석
1.1.1. 어휘의 풍부함
성서가 전해 주는 죄에 관한 어휘를 분석할 차례가 오겠지만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죄악을 지적하기 위하여 흔히 쓰이는 어휘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죄란 말이 원래 못된 사람을 잡는 행위를 뜻하는 한자이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죄를 범했다. 죄를 얻었다, 석고 대죄 등 보면 남의 잘못에 대하여 누가 판단을 내려야 비로소 죄가 성립된다는 인상을 주는 개념이다. 죄란 말을 보면 죄와 벌이 혼동된 것 같다. 죄를 범한다, 저지르다, 틀리다, 나쁘다, 그르치다 등등 행위와 동시에 행위를 평가하는 동사가 허다하다. 죄악을 지적하는 명사나 대당어도 많다. 악, 탈, 액, 난리, 무리, 부정 부패, 부조리, 실수, 실례, 무례, 과오, 과실, 대당어는: 미추, 진위, 선악, 시비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물론 이 명사들이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외연이 다르고 해당 범위도 다르다.
첫 인상에서는 이 수 많은 개념들이 신-인 관계와 관련된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죄악의 성격을 들어내는 단어가 거의 없고 다만 상대적인 윤리 평가를 나타내는 단어가 끼여들어 있다. 그런 반면에 이 단어들이 이용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 종교에 해당하는 어휘: 탈, 천벌 등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조종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말하고 있다. 뜻밖에 닥치는 악을 말해 줄뿐이지 하느님과 관련된 개념이 없고 공평한 심판과 연결된 개념이 없다. 죄악을 신성화시키려는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이런 차원에서 “억울하다”는 말이 흔히 쓰이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둘째로 윤리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 어휘도 있다(악, 부패, 부정, 선악). 무엇보다도 인간의 행위를 도의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려는 태도에서 생긴 어휘이다. 셋째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개발된 정치적 가치를 띤 단어도 엿볼 수 있다(실례, 무례,과오, 과실). 폭력을 지탄하기 위하여 아니면 은폐하기 위하여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 점에서 일반 사회에서 행위의 윤리성과 정치성이 구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건들이 “적당하게” 해결되는 것을 보고 죄악의 정치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넷째로 인간의 무지와 무식을 지적하는 단어가 많다. 이 단어들이(부조리, 무명, 난리, 무리, 시비, 진위)진리를 탐구하는 데서 생긴 결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식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시 개념들이 계시와 내용을 표현하기 부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 개념들이 신-인관계와 결부시키면 계시의 전달에 있어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분별없이, 비판 없이 그런 개념을 사용할 경우 대다수 신자들이 입교하기 전 상태에 머물 것이고 회개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 전통적인 신학의 책임도 크다. 기독교에서도 죄란 개념이 지나칠 정도로 이용가치를 쥐고 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죄는 무엇보다도 해명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죄부터, 죽음, 질병을 설명하기 위하여 죄개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은 죄악을 설명하는 데 이미 새로운 설명을 ‘구입’했다고 볼 수가 있다. 즉 심층 심리학을 비롯하여 생리학까지 총동원하여 이제 죄악 개념 없이도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인간이 당하는 질병과 죽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신인 관계를 드러내야 했던 이 개념들이 죄의식에 있어서 도리어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허위 문제와 관련해서 죄악의 악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현을 살펴보아야 한다. 흔히 쓰이는 말을 보면“부끄럽다, 더럽다, 무겁다, 어둡다”등의 동사들이 죄를 때묻음으로, 지어야 할 무게로, 벗어나야 할 암흑으로 그려 준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인간의 심정을 감정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대부분이지만 죄의 성격을 외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단어들은 신인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자기 입장만을 본능의 차원에서 묘사하는 데 육체적인 반응을 잘 드러낸다. 또한 주로 감각과 관련된 상징성을 띤 표현들과 함께 안색을 묘사하는 숙어들도 빼놓을 수 없다. 죄를 색깔, 특히 적색과 흑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모든 문화권의 상례이다. 또한 관능적인 차원을 떠나서 죄를 위배로 보는 관례에서도 죄의 표현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사법에 따라 따질 범죄가 법의 위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단절로 보아야 할 죄는 상징적인 위반으로 표시된다.
1.2. 나의 죄를 인식하는 과정
죄악을 당하든 또는 범하든 간에 안간은 복잡한 반응을 보인다. 죄악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을 세 차원에서 알아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인간이 동물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본능적인 차원에서 죄에 관한 인식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 이라 하겠다. 본능적인 차원이란 육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대외관계를 즉 본능을 자발적인 반응이라 할지라도 항상 상대방과 욕구의 대상에 대한 반응이다(예를 들면, 나를 공격하는 자에 대한 반응 : 내가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반응 등). 둘째로 인간의 활동, 특히 죄악에 대한 반응은 윤리적 차원에서 연구할 수 있다. 윤리적 차원이란 의식적으로 자유를 행사하면서 자율성을 찾는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의지와 이성 덕분에 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죄악을 범할 때의 인간의 반응은 본능적인 차원과는 아주 다르다. 셋째로 인간의 행동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신앙적 차원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신의 인도 아래 절대자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며 형제로 삼아야 할 인간들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생활이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비로소 새로운 존재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죄악에 대한 반응을 철저히 분석하기 위하여 몇 가지 기준을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지적한 다음에 법, 죄악, 벌, 그리고 인간이 세우는 대책을 차례로 알아보겠다.
1.2.1. 본능적인 차원에서 죄악감을 느낀다.
짐승이든 인간이든 간에 경쟁에 휘말릴 때나 상대방의 저항을 받을 때나, 또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죄책감을 느낀다. 우선 대꾸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싶은 심정과 동시에, 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어쩌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아 내는 것 같으면서도 일단 돌파구를 찾는 것이 보통이다. 죄책감이란 무척 막연한 개념이지만 다행히도 다른 개념이 개발되었는데, 이는 죄장감(罪障感)이라 한다. 생소한 이 단어는 사전에 의하면 “도덕, 게유, 습관 등을 위배하고 있다고 느끼어 이에 지배되고 있는 정서의 상태, 곧 자기의 규범에 의해서 생기는 양심적 불안”이라 한다. 이 정의에 따라 죄악 앞에서 인간의 첫 반응은 감정이나 정서, 특히 불안으로 표시된다. 이 정의를 보면 인간은 자기 중심을 떠날 줄 모르고 자기 입장만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죄장감을 일으키는 법은 외부적으로 부과된 제약이나 억압, 또는 견제로 보인다. 계율이나 풍습등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이는 “해서는 안될 행위”만을 강조하는 듯하다. 따라서 무의식 중에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법이나 규칙은 어떤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법들을 위배할 경우, 사회생활(가정에서, 마을에서, 신학교 공동체에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은 외부적인 억압으로 여겨지는 데 심층의 요구를 억제하는 외부 세력으로 느껴진다. 이런 법을 위배할 때 인간은 먼저 반항심과 초조감 및 불안감을 느낀다. 곧 인간은 사회의 체제를 두려워하면서 공포와 실패 감을 느낀다.
죄악이란 일단 어떤 금지령의 위반으로 보인다.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즉 자유가 작용하였든지 또는 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 위반 자체가 죄악으로 여겨진다. “들켰다, 재수 없다”와 같은 표현들이 죄악을 부정적으로 잘 표시하고 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질렀다는 행위가 육체적인 반응으로 (안색, 땀) 드러난다. 죄악을 따르는 벌에 대하여도 역시 소극적인 반응이 보인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벌은 피해야 한다는 심정이다. 따라서 이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 잘못을 무조건 부인하게 된다. 대책이 있다면 회피 작전뿐이다. 따라서 회개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덜미잡힌 자가 분개, 원한, 회한을 느끼면서도 자기 잘못을 은폐하려 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번만은 봐 다오”라고 호소를 한다던가 무슨 방편으로든지 ‘안전지대’에 돌아가려고 한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과 타협하든, 어떤 단체의 장상 앞에서 자기 결백함을 주장하든 간에 자기가 사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마술을 뿌리면서까지 신과 타협하고 죄악을 없는 것으로 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심정은 본능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성서도 그러한 분석을 하고 있다. 카인의 이야기나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사피라의 이야기도 그렇다.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이지만 사목상 무시할 수 없는 반응이다. 어쨋든 각자가 일단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우선적으로 그런 반응이 보인다. 많은 경우에 죄의 의식이 이 차원에서 끝난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특히 고백성사를 볼 때 하느님과 화해하기보다도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경우가 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며 죄를 고백하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제거할 수도 있다. 어쨋든 죄인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실망이나 미움을 느낄 때 본능적인 차원에 머물게 된다.
1.2.2. 윤리적 차원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인간다운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요구와 기대를 많이 의식한다. 이는 공동 의식이 앞서고 있기 때문에 이 죄악의 결과를 책임짐으로써 파괴된 공동선을 회복하려는 태도이다.
이 차원에서 법은 더 이상 외부적인 억압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법을 승화함으로써 법을 자기 존재의 규범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율성을 찾는다. 이 자율성은 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제 자기를 확인하게 한다. 자시 자신과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나선 인간이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자기의 성장과 발전을 이룬다. 자율성이 인간 상호간의 의존 관계를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사회에 위치하는 인간이 자아실현과 완성을 노리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자아의식이 성립되고 양심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죄악은 악행이라 해도 좋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위배 자체보다 행위를 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행동 자체보다 내려진 결단의 비중이 더 크다. 결국 죄는 양심의 판단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악의로 행동함으로써 자기 자유를 스스로 유린한다. 죄 자체보다 죄의 경위와 죄의 동기, 즉 의지의 결정과 이성의 판단에 역점을 두는 것이 윤리 인의 심정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행위 자체를 과소 평가할 수 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신경을 덜 쓰는 것이다. 죄악이 상쇄할 수 없는 악이며 지울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할 위험이 있다. 사회를 위하여 일하겠다던가, 책임을 진다는 말은 용감하고 성숙한 인간을 드러내지만 죄악의 악성이 그만큼 은폐될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죄책감은 행위 자체를 보고 생긴 감정이라기 보다도 행동자가 자기 자신을 보고 느낀 감정이다. 이는 자아 실현에 반대되는 불충실하고 불성실한 태도에서 나온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죄악에 해당하는 벌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벌이 자기 존재의 위축으로 여겨진다. 될 수 있으면 사회에 유리한 벌, 건설적인 벌, 인간의 존엄성을 돋보이게 하는 벌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인간을 동물 이하로 취급하는 형벌에 대한 건전한 반응임에 틀림없이. 악행이나 벌은 인간의 全인생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다시 한번 희생자가 될 경우가 있다. 행위 자체에 역점을 두면 가해자에게 불리한 평가가 나오고 피해자에 유리한 판결이 나온다.
그 대책으로 인간은 남의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퇴보를 막으려 한다. 그리고 인간은 개선책을 모색하기도 하고 공동선에 이바지하려는 자아 관여를 아끼지 않는다. 성서, 특히 지혜 문학에서 윤리적인 차원에 서 있는 인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간은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성 생활에 있어서는 이런 태도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적인 태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좋으나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마음이 강해지면 하느님에게까지 소급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말하자면 신앙과 윤리의 관계가 모호해 질 수 있다. 이처럼 순수한 윤리적 차원에 머물게 되면 고백성사도 고통스럽고 짐스러운 행사가 되는 것이 일쑤다.
1.2.3. 신앙의 차원에서 : 배신을 의식한다.
이런 차원에서 과연 법이란 개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이제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생활을 할 따름이다. 하느님의 뜻이란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 선물로 인식된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 매개체로 구체화된다. 첫째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형제애로 실현되며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가늠자가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인간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마르 12, 28-31). 인간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고 나의 형제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보겠는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子性을 부정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면 그분의 신성과 인간성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태도와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분리시킬 수 없고 다른 인간들을 사랑하는 생활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신-인관계의 성립에 있어서 형제애는 필수적이다. 나아가 이 형제애를 구체화하고 내실화 시키는 길잡이가 있어야 한다. 이 길잡이가 바로 성서의 내용과 그 내용을 해석하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길잡이는 계명이라고 해서, 원래 구약성서에 십계명이 하느님의 열가지 말씀이라고 불렸던 사실을 감안하여 계명이란 것을 법, 규칙, 사법적인 개념과 결부시키지 말고, 말씀, 계시, 대화, 사랑의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신인 관계가 인간의 임의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지니면서도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관계들이 더 이상 법과 규칙으로 통제될 수도 없고 업무를 부과하는 당위성을 찾을 수도 없으며 더구나 합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타인 즉 상대방의 만족에 있다. 성서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 원칙은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이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죄는 이제 더 이상 법의 위반으로 나타나지 않고 관계의 단절과 사랑의 거부로 인식되어진다. 이 차원이라야 교회와 성서가 말하는 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편의상 악행과 죄를 구별하긴 했는 데 이는 윤리적 차원과 신앙적 차원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자신의 잘못은 당연히 악행, 즉 나쁜 행위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의 죄는 악행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상태도 될 수 있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자기 생활과 악행에 대하여 책임을 지면서도 자기 행동에 대한 최후 판단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법, 혹은 양심에 따라 인간이 자기 행위의 악성이나 선성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상대방이 되어 주신 하느님께서 신-인관계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행동과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이 죄를 평가하는 기준을 하느님께 맡기는 태도는 인간이 자율성이나 판단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한 존재로 형성하시는 자기 자신 아닌 타자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율성과 판단력, 그리고 자기 존재까지도 보장해 주신 하느님께 귀의하는 근본 태도를 통해서 자기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벌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별도로 내리시지도 않고 죄에 대한 앙갚음을 하시지도 않는다. 벌은 사랑의 거부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다. 죄자체가 벌을 가져오며 거부는 결핍으로 변한다. 당신 사랑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별도로 다른 형벌을 주지 않으신다. 인간의 탓으로 생긴 사랑의 거부는 사랑의 결핍으로 변한다.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죄에 해당하는 벌은 사랑의 결핍으로 귀착한다. 인간은 그런 벌을 피할 수도 없고 스스로 벌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벌을 상쇄하는 어떤 속죄나 복원 작업도 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거저 주시지 않는 한 신-인 관계는 사랑의 거부로 그리고 사랑의 결핍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벌을 피할 수도 없고 인간의 행위를 상쇄할 수도 없으며 자기 상태를 회복할 수도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죄의 악성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죄는 어떤 질서를 무너뜨리고 어떤 법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즉 존재자로 형성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인간은 대개의 경우 죄의 심각성과 이로써 생기는 절망적인 상태를 초래하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즉 하느님의 계시가 없는 한 죄의 악성을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인간을 형편없이 만드신 그런 하느님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를 없애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 세상에 개입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취약성과 악성을 지적하시기 위하여 임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의 악성을 드러내신다. 혹자가 말하길 결국 하느님이 병도 주고 약도 준다는 식으로 인간의 형편을 지적하시고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본능적인 차원이나 윤리적 차원에 머무는 자들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차원에 서 있는 인간은 자기의 형편보다 자기 존재의 조건을 깨닫게 되고 신인 관계의 중대점을 알게 되고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차원에서의 인간은 하느님 덕분에 자기의 불성실한 태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처럼 용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게 된다. 용서는 죄를 그냥 취소하는 것이 아니고 원상태로 돌아가는 단순한 말소가 아니다. 용서는 깨뜨려지는 신-인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새출발이다. 다시 말해서 용서는 죄를 은폐하거나 죄를 없는 것으로 하는 타협이나 눈감아 주는 아량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인간을 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보다 나은 상태로 그를 올려 주신다. 용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악의 無, 즉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서 새로 태어나는 셈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無에서 우리를 일으키셨듯이 이제 용서로써 악의 無에서 우리를 일으키신다. 인간이 용서를 받음으로써 자신을 자기 죄로 이끌던 그 악의 無를 잊을 수 없게 된다. 상대방이신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써 가능한 재생이다. 용서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 관계를 생생하게 말해 주고 있다. 창조에서 이미 드러난 그 절대적인 의존 관계가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즉 용서를 통해서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2.4. 그리스도교 신자가 느끼는 죄책감과 죄의식
이제 신자가 죄를 어떻게 의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간단하게 다루어 보자. 죄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라 한다면 죄에서 생긴 죄책감과 죄의식은 반드시 하느님과 관련해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신-인관계의 기준이시고 핵심이시며 그 관계의 주역자이시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파괴된다. 따라서 인간은 죄를 평가하는 데 그 기준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윤리적 차원에서의 악행은 인간 자신에만 해를 미치는 것이지만, 신-인관계에 있어서의 죄는 인간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해를 끼치는 것이다. 죄가 하느님의 본성과 하느님의 대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대외할동에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상처를 입으신다”고 말할 수 있다. 손해를 보는 측은 인간뿐이지만 그 인간은 분명히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죄로 인하여 창조 사업뿐만 아니라 한층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얼마나 관여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당신의 대외할동에 있어서 받을 충격을 각오하셨고 당신 계획에 차질이 생길 위험성도 허락하셨다. 더욱이 인간을 당신 신성에 참여시키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 사랑, 즉 당신 자신을 한층 더 내놓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죄책감을 느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이 죄책감은 배신하는 감정으로 발달되어 하느님께 대한 죄책감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느끼는 죄책감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죄책감은 하느님 안에 투영된 단순한 인간적인(본능적, 윤리적)죄책감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을 따라 사는 윤리적 차원에 서 있는 인간은 단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그 때문에 이 차원에서의 인간은 벌을 자기 자신의 위축으로 이해한다). 단죄는 맹목적이고 자동성을 띤 무서운 불가사의로 보인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의 단죄는 용서의 조건이기 때문에(죄인으로 취급된 사람에게만 용서를 베풀 수 있다), 오히려 해방으로 볼 수 있다. 신앙적 차원에서는 인간을 마비시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타자이신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맡김으로써 인간이 비로소 공포와 초조에서 해방된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했던 인간이 이제 불안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몸소 그 돌파구를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드디어 법, 위반, 단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간을 형제로 모시면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을 어떻게 사랑할까 하는 문제만 남았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시고 우리를 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자유를 재발견하는 성소를 완수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인 관계의 절대성을 발견하여 인간을 마비시키는 죄책감에서 인생을 좌우하는 자유, 즉 책임에로 나아가야 한다.
1.3. 나의 죄와 남의 반응
여태까지 우리는 인간이 자기 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여 주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죄는 항상 남과 관련된다. 죄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로 보아야 하지만 이미 강조 한대로 신-인관계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매개로 드러나고 실현된다. 따라서 남의 반응은 나의 죄의식을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1.3.1. 인간이 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원한으로써 자기 죄를 드러낸다. 어마어마한 결과를 보고서 인간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일단 인간은 느끼는 죄악감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미약함을 거부한다. 자기 미약함을 거부하든지 또는 변론하든지 간에 인간은 現세상을 탓하기 위하여 보다 나은 세상이나 現세상과 반대되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원한은 양심의 거리낌이 된다. 즉 미약한 자가 자기 자신을 고발함으로써 강한 자들을 고발한다. 강한 자들의 비위를 지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행위들이 바로 그 원한에서 생긴다. 그러나 원한이 남에 대한 의존감에 관계없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미약한 자를 두둔하는 복수의 하느님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한을 풀어 주는 하느님께로부터 벗어 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양심의 거리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니체의 논지를 보면 자기 잘못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기 잘못을 부정한다. 남을 고발하기 위하여 자살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태도는 죽더라도 불행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원한에서 생긴다. 사실 원한이란 감정은 자기 불행을 양성화시키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남을 고발하는 미약한 자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 원한 이외에 자기 잘못을 밝히는 행동도 있다. 바로 고백이다. 고백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남이 강제로 얻은 고백이 있는데, 이는 치명적인 불안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번복할 수 없는 판단을 받아들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둘째 위로와 안심을 얻기 위한 고백도 있다.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다른 사람에게 제 잘못을 자백할 때 자기 잘못을 인정하긴 하되 결과가 무서워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려는 속셈에서 한다. 결국 책임을 회피하는 작전이다. 셋째 사회와 장상들에 도전하는 고백도 있다. 동지나 부하들의 칭찬이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자기 잘못을 뻔뻔스럽게 과시하는 자가 결국 불안을 은폐(隱蔽)하려는 작전을 벌이는 것이다. 고백성사에 있어서 고해신부는 첫 번째의 강제 고백을 삼가야 하고 고해자는 둘째와 셋째 양식의 고백을 삼가야 한다. 그러나 화해를 촉진하는 고백도 있다. 이 진정한 고백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변명과 핑계를 포기 할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사실 그대로 고백할 때 화해가 가능하다. 이 고백은 자비에 호소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나오며 용서를 바라는 태도는 상대방의 애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을 아시는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받아들일 때 고백성사가 효과를 내는 것이다. 고백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오직 상대방만을 믿는 행위이다.
제 1 부 : 죄론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