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선교를 위한 활동-한국 천주교회의 북한선교 활동(해방후~1980년대까지 북한선교)

 

Ⅱ. 북한선교를 위한 활동




        1. 한국 천주교회의 북한선교 활동




          1) 해방후 ~ 1980년대까지 북한선교 활동




이 시기에 천주교회가 북한선교를 위해 뚜렷이 내세울 만한 활동은 거의 없다. 단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사목적 교서나 선언문이 대부분이다.


1960년대 문헌 가운데 북한선교 내지 통일사목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문헌가운데 하나가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및 기도문의 인준을 결정한 주교회의의 결정서이다. 1965년 2월에 개최된 주교회의에서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날은 매년 6∙25 다음 주일에 전국적으로 실천될 것이다”라는 결정사항이 채택되었고 곧 이어 같은해 6월말에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침묵을 위한 기도문’이 인준되어 북한 교회를 위한 기도 운동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1)


이 때 ‘침묵의 교회’ 라는 표현은 원래 ‘철의 장막’에 갇힌 수난의 교회라는 시대적 상징성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시보」는 1965년 6월27일자 사설에서 6∙25 전쟁 15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주교회의에서의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제정을 뜻깊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제야 겨우 그들을 기구중에 공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 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분단의 현실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북한 교회를 망각하거나 우리 마음에 있어서까지 분단의 장벽을 두텁게 쌓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내 통일논의의 효시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현석호의 「남북통일론」(가톨릭시보, 1966,9,18)은 남북통일이 평화적으로,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2)


1970년대에 있어 통일사목과 직접 관련되는 주교단의 사목교서는 월남의 패망에 따른 입장을 나타낸 「공산주의에 대한 결의문」(1975.5.5) 1건에 불과하다. 여기에 보탤 수 있다면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두봉 주교의 메시지나 김수환 추기경의 시국 메시지 등이 있을 뿐이다. 두봉주교는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언급하는 메시지에서 “남과 북이 먼저 자체 내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 남한에서 민주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1979년에도 「3∙1절 60주년 기념미사 강론」을  통하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면서 “우리 민족의 통일에로의 현실적이요 또한 가장 가까운 길은 인권존중과 민주주의 회복에 있다”3) 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인식이 한국 주교단의 공식입장 천명으로는 표출되지 못했다.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통일사목에 관한 교회의 활동을 살펴보면서 먼저 한국 교회는 스스로의 반성과 함께 많은 부분들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1784년의 교회창설이래 한말의 상황과 일제 식민통치기간 그리고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현실과 함께 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거나 구원하여야 할 시대적 사명과 책임의 수행에는 너무도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4)


먼저 남한의 교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단독정부 수립론에 찬성을 표시했다. 이 당시 교회가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던 것은 남한만이라도 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민족주의적인 인식과 훈련’이 부족했고 통일과 분단이라는 ‘민족사적 안목’에서 그것을 바라볼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와의 대립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던 남한 교회는 교회의 전통적 입장인 ‘반공’의 논리를 넘어서서 ‘멸공’의 논리까지 내세우게 되었다.5)


  당시 교회는 로마 가톨릭이 취해오던 반공주의적 입장의 연장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분단체제가 성립된 이후 교회는 민족분단의 비극적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독자적 노력이나 의견발표를 거의 하지 못했다. 분단 이후 80년대 이전까지의 교회는 민족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신학적, 사목적 입장에서 정리하여 제시해 주기보다는 정치권의 통일 논의를 뒤따르는 경향을 견지해왔다.


한편 1970년대에 이르러 급속해 진행된 경제성장과 더불어 남한 사회가 북한사회를 흡수하여 통일할 수 있다는 ‘흡수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정치권의 이론과 관련하여 교회의 정복론적 통일논의도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반공적 교회 분위기는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하여 북한 공산주의자와의 대화를 비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동포를 적이나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생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정복론이나 흡수론이 아닌 평화통일 논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0년대 이르러 북한선교 내지는 통일사목에 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고 주교회의 산하에 이 문제를 다루는 특별기구도 설립되기에 이르른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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