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선교를 위한 활동-한국 천주교회의 북한선교 활동(1980년대의 북한선교 활동)

 

2) 1980년대의 북한선교 활동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대북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북한선교위원회」의 출범이다.


한국 교회는 80년대를 맞이하면서 조선교구설정 150주년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는데, 특히 20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다가올 선교 3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쇄신작업을 폭넓게 추진하게 되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남북분단이라는 비참한 현실을 복음의 빛으로 다시 비추어 보게되는 가운데 북한선교라는 문제를 보다 깊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1)


이에 따라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두게 되었는데 북한선교부 총무를 맡았던 김몽은 신부는 1983년 6월 26일자 「가톨릭신문」논단에서 북한선교 사업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 의의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김몽은 신부는 “북한선교는 아무리 일찍 서둘렀어도 지나침이 없는 일 중의 하나” 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작 우리 교회가 북한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이후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1970년대초 교회언론에 실린 몇편의 글들은 남북적십자회담의 개최 이후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따른 시사적인 관심을 나타낸것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앞에서 고찰했다.


김몽은 신부는 개신교의 경우 1977년에 「북한선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북한선교의 당의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200주년 기념 행사에 어떤 형태로든 북한 교회가 참여할 수 있기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점을 감추지 않았다. 이같은 한국 교회의 여망은 5년뒤의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거듭 부각되었는데 이러한 바램의 지속이 북한선교를 뒷받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2)


1982년 12월에 작성된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북한선교 사업계획(초판)을 살펴보면 북한선교 사업의 초기 추진 형태가 파악된다.


이 계획안은 선교사 양성 진출, 선교문 제작, 선교부정착, 200주년 기념행사에 북한 교회대표 초청시도, 일본․홍콩 등지에 연락지부 설정, 1988년 이후 재정자립 3개년 계획 수립및 추진, 홍보물 간행, 대북 선교방송국 설립 추진, 연중 정기적으로 북한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기도운동 전개, 전국 차원의 모든 회의와 대회에 북한 교회 각 교구대표자리 마련, 통일에 대비한 성직자․수도자․전교사 인력 양성 등 상당히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이 가운데 특징적인 것을 살펴보면 비록 성사되지 못했지만 200주년 기념행사에 북한 교회 대표의 초청을 시도한 점이다. 그리고 대북 선교방송국의 설립 추진과 해외 지부의 설치 등 다각적인 사업 추진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한국교회 전체의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충분한 결의를 엿볼 수 있게한다.3)


이상의 계획초안은 다시 정리되어 200주년 기념사업이 지난 뒤에도 계속될 수 있는 마스터 플랜으로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200주년 행사가 끝난 1984년 11월에 개최된 주교회의 총회에서 북한선교부는 주교회의 산하기구로 설치되었다. 그후 북한 선교부는 1985년 2윌에 제1차 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여 기획, 총무, 연구, 선교, 교육, 홍보 등 6개 분과 위원회를 구성하는 세칙을 확정지었고 이와함께 6월에는 북한선교위원회가 창립되어 보다 안정적인 재정적 뒷받침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후 10월에 「북한선교부」의 명칭이 「북한선교위원회」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주교회의 기구인 전국 위원회의 승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과 두달 후인 1985년 12윌에 열린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즉 “북한선교위원회는 앞으로 북한선교에 대한 국내 신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계몽운동과 기도운동을 전개하되 그 예산은 후원금으로만 충당하도록 하고, 북한 선교에 대한 정책 결정및 실질적인 대외 활동을 상임위원회에서 관장하기로 하였다” 는 것이다.


이와같은 결정은 북한선교 사업추진의 폭과 한계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와 북한선교위원회의 활동이 단순히 기도운동이나 대내적 계몽운동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선교위원회의 활동은 1980년대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상반기보다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4)


그것은 북한선교위원회가 주교회의 산하기구로써 대북관계와 같은 대외 활동이나 정책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거나 결정할 수 없기때문에 대내적인 기도와 교육, 홍보 활동의 차원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한선교의 핵심을 이루게 되는 대북한 접촉의 권한이 배제되어 있으므로 북한 교회의 재흥을 위한 정책의 수립과 실질적인 정책의 집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80년대 한국의 대북정책은 언제나 베일에 쌓인 채 한반도 통일환경의 변화 및 남북관계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 노력에 한계를 보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 마태오 신부의 경우로 그는 1984년에 북한선교를 위한 해외활동 임원으로 파리에 부임하여 북한측과 접촉, 분단 후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사제가 되지만, 그의 열정적인 노력은 1년여만에 표류하기 시작하여 끝내 불발탄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야기된 파장과 서경원 위원의  밀입북사건 그리고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대표로 방북한 임수경 양, 임양을 위해 방북을 결정한 문규현 신부, 또한 이들의 판문점 귀환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한국천주교회는 이같은 ‘시대의 징표’를 우리 민족사회에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하여 자리매김하는 노력에 일정한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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