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선교학(Missiology)-선교역사(중세시대)

 

3. 중세시대




1)중세 서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이란 삼화음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인제 교회사의 무대가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옮겨졌다.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고(395),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476, Byzantium제국은 1453),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고도의 도시문화와 게르만 부족들의 소박한 환경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미개인’(야만인)1)이라 부르던 게르만 민족의 로마제국 정복은 교회조직이나 생활에 커다란 혼란과 심각한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유럽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게르만 민족을 서서히 개종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갖추도록 교화하였다.


2)제1기(500-700); 무엇보다도 프랑크(Franks)족의 개종(Clovis, 496)은 정치 종교적으로 중대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크인과 가톨릭 교회의 유대관계를 맺게 하였고 두 세력의 일치는 쌍방의 확장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집단적인 세례가 있었지만 이교적인 관습, 풍습, 관념은 200년이나 지속되었다.


제2기(700-1050); Anglo-Saxons 족이 개종하고, 프랑크 왕국은 교황청과 우호동맹을 맺고(754, 스테파노 2세와 카롤링거 피핀) 왕국의 일부 영토를 교황에 기증하여(756) 교황령(교회 국가)의 기반을 이루고, 교황이 중세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교황은 카알 대제를 로마 황제로 대관하고(800)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다(962-1806). 교회는 왕국의 협조와 보호 속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호메트(671-6320의 이슬람 아랍 세력의 등장으로 선교의 범위가 유럽에 제한되었으나, 5C 영국에서 시작하여 1386년의 발틱해 리투니아가 개종함으로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는 완성되었다 도시구조에서 성공한 교회는 게르만의 농업구조를 받아들였고(성직록, 본당), 사유교회제도가 생겼으며, 엄격한 신분제는 교회의 고위 및 하위의 성직의 구분으로 귀족정치를 비호하였다. 전투적인 자세는 기사도, 성전(聖戰), 십자군을 초래하였으며, 신성한 왕권 형성은 영방(領邦)교회를 형성하고 재산과 인사권의 간섭은 성직매매와 임직(任職)권논쟁을 야기했다.


제3기(1050-1300); 교황권과 제권(帝權) 사이의 투쟁은 시대를 지치게 하였고, 인노첸시오 3세 때 교황권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십자군, 기사(騎士) 수도회, 수도생활의 번성, 대학의 탄생, 신학의 번성, 로마네스크와 고딕 예술의 번영이 있었다. 제4기(1300-1500); 중세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지방의 제후들이 독립을 추구하고 지방분권이 추진되었으며 공의회(公議會)수위(首位)설이 되두되었다. 문예부흥의 인문주의 정신은 종교개혁을 불러왔다.


3)중세의 기본적인 특성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예속이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도덕률, 지상에서의 결정적인 최고의 윤리적 권위, 모든 이가 굴복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교황권과 제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철저한 신분계급은 하느님이 정한 지상의 질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들이 엘리트로서 정신적이고 교육적인 삶을 지배하였다.


중세 선교의 주도세력은 수도원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Gregorius I, 590-604)이 Anglo-Saxon족의 복음전파를 위해 로마의 Benedictines수사들을 파견함으로써 수도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수도자들의 덕행과 순교 정신은 깊은 감명을 주었고 열성으로 선교하였다. 수도원과 순교정신은 유럽의 선교에 중요한 요소였다. 선교사업은 인제 개인적인 자발적 행동에서부터 교회 당국의 조직적인 선교정책에 의해서 이행되었다. 원거리 선교는 교황들과 게르만 왕들 및 비잔틴 황제들과 주교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절 내지는 보호를 받는 이들이었다. 일반대중은 그들의 영도자들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신자가 되었고 왕들은 교세 확장에 중점을 두었고, 영신적인 동기보다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군사적 원정=선교활동).


4)중세기의 유럽은 북으로 북극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대서양까지였고, 동남부는 이슬람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동서 두 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러 왕국들로 분리되어 있었다. 동방이교(東方離敎, Schisma orientale, 1054)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공동으로 보유해 온 위대한 종교적 유산과 그리스-로마문화와 로마에서 유래된 제도들에 의해서 인종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영향력은 스페인의 국토회복전쟁(Spanish Reconquista, 711-1492), 십자군전쟁(Cruisades, 1096-1270, 8차례), 동유럽의 전쟁에서 발휘되었으나, 콘스탄틴노플이 함락되었다(1453). 선교적 성격을 지닌 다양한 기사수도회(Military Orders)들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외방선교에 주력한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였다. 그들은 곧 선교학자들을 배출했는데, 사라센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Raymund Lull(제3 프란치스코회)과 힘보다는 지혜를 주창했던 Roger Bacon, O. F. M)이다. 그들은 특수한 선교 그룹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로 인한 기사 수도회’(O. P, 14C초), ’그리스도를 위한 기사 수도회‘(O. F. M, 15C초)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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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선교학(Missiology)-선교역사(중세시대)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중세시대


    1)중세 서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이란 삼화음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인제 교회사의 무대가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옮겨졌다.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고(395),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476, Byzantium제국은 1453),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고도의 도시문화와 게르만 부족들의 소박한 환경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미개인’(야만인)1)이라 부르던 게르만 민족의 로마제국 정복은 교회조직이나 생활에 커다란 혼란과 심각한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유럽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게르만 민족을 서서히 개종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갖추도록 교화하였다.

    2)제1기(500-700); 무엇보다도 프랑크(Franks)족의 개종(Clovis, 496)은 정치 종교적으로 중대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크인과 가톨릭 교회의 유대관계를 맺게 하였고 두 세력의 일치는 쌍방의 확장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집단적인 세례가 있었지만 이교적인 관습, 풍습, 관념은 200년이나 지속되었다.

    제2기(700-1050); Anglo-Saxons 족이 개종하고, 프랑크 왕국은 교황청과 우호동맹을 맺고(754, 스테파노 2세와 카롤링거 피핀) 왕국의 일부 영토를 교황에 기증하여(756) 교황령(교회 국가)의 기반을 이루고, 교황이 중세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교황은 카알 대제를 로마 황제로 대관하고(800)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다(962-1806). 교회는 왕국의 협조와 보호 속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호메트(671-6320의 이슬람 아랍 세력의 등장으로 선교의 범위가 유럽에 제한되었으나, 5C 영국에서 시작하여 1386년의 발틱해 리투니아가 개종함으로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는 완성되었다 도시구조에서 성공한 교회는 게르만의 농업구조를 받아들였고(성직록, 본당), 사유교회제도가 생겼으며, 엄격한 신분제는 교회의 고위 및 하위의 성직의 구분으로 귀족정치를 비호하였다. 전투적인 자세는 기사도, 성전(聖戰), 십자군을 초래하였으며, 신성한 왕권 형성은 영방(領邦)교회를 형성하고 재산과 인사권의 간섭은 성직매매와 임직(任職)권논쟁을 야기했다.

    제3기(1050-1300); 교황권과 제권(帝權) 사이의 투쟁은 시대를 지치게 하였고, 인노첸시오 3세 때 교황권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십자군, 기사(騎士) 수도회, 수도생활의 번성, 대학의 탄생, 신학의 번성, 로마네스크와 고딕 예술의 번영이 있었다. 제4기(1300-1500); 중세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지방의 제후들이 독립을 추구하고 지방분권이 추진되었으며 공의회(公議會)수위(首位)설이 되두되었다. 문예부흥의 인문주의 정신은 종교개혁을 불러왔다.

    3)중세의 기본적인 특성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예속이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도덕률, 지상에서의 결정적인 최고의 윤리적 권위, 모든 이가 굴복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교황권과 제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철저한 신분계급은 하느님이 정한 지상의 질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들이 엘리트로서 정신적이고 교육적인 삶을 지배하였다.

    중세 선교의 주도세력은 수도원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Gregorius I, 590-604)이 Anglo-Saxon족의 복음전파를 위해 로마의 Benedictines수사들을 파견함으로써 수도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수도자들의 덕행과 순교 정신은 깊은 감명을 주었고 열성으로 선교하였다. 수도원과 순교정신은 유럽의 선교에 중요한 요소였다. 선교사업은 인제 개인적인 자발적 행동에서부터 교회 당국의 조직적인 선교정책에 의해서 이행되었다. 원거리 선교는 교황들과 게르만 왕들 및 비잔틴 황제들과 주교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절 내지는 보호를 받는 이들이었다. 일반대중은 그들의 영도자들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신자가 되었고 왕들은 교세 확장에 중점을 두었고, 영신적인 동기보다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군사적 원정=선교활동).

    4)중세기의 유럽은 북으로 북극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대서양까지였고, 동남부는 이슬람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동서 두 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러 왕국들로 분리되어 있었다. 동방이교(東方離敎, Schisma orientale, 1054)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공동으로 보유해 온 위대한 종교적 유산과 그리스-로마문화와 로마에서 유래된 제도들에 의해서 인종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영향력은 스페인의 국토회복전쟁(Spanish Reconquista, 711-1492), 십자군전쟁(Cruisades, 1096-1270, 8차례), 동유럽의 전쟁에서 발휘되었으나, 콘스탄틴노플이 함락되었다(1453). 선교적 성격을 지닌 다양한 기사수도회(Military Orders)들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외방선교에 주력한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였다. 그들은 곧 선교학자들을 배출했는데, 사라센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Raymund Lull(제3 프란치스코회)과 힘보다는 지혜를 주창했던 Roger Bacon, O. F. M)이다. 그들은 특수한 선교 그룹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로 인한 기사 수도회’(O. P, 14C초), ’그리스도를 위한 기사 수도회‘(O. F. M, 15C초)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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