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회개
1. 개념
‘최초의 복음 선포자’이신 예수의 복음의 기본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이다. 성자와 성령의 신적인 사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도록 부르시고, 인간은 이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 召命은 회개이다(마르1,15; 16,15; 마태28,18-19; 현대의 복음선교8, 교회5). 복음서는 회개(metanoia) 즉 내적인 쇄신으로 추구되는 근본적 회개, 마음과 정신의 깊은 전환을 의미한다(현대의 복음선교10). 구약성서의 ‘돌아서다’(shub)는 하느님이나 이미 주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로 되돌아오거나 돌아섬을 말하며 계약의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 신약성서는 마음(noe)의 변화(meta) 곧 전인적으로 철저하게 돌아서서 본래의 집으로 돌아옴을 의미하는 metanoia(epistrophe)를 사용한다.1)
중요한 사실은 성자를 통한 회개에로의 부름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초대라는 것이다. 이는 지성적 견해나 의견의 변화를 의미하거나 혹 윤리적 판단이나 특별한 대상과 계명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뛰어넘는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있어서 인간 존재 전체와 관련된다. 믿음의 발생과정과 신앙의 구조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선사로서의 은총 없이는 인간에게서 믿음의 발생은 불가능하다. 부르심으로 표시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 인간은 은총의 활동을 깨닫게 된다. 이 하느님의 부르심은 의무를 부과하고 그 의무에 순명하도록 하며 자기 선사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부르심이며, 인간을 원리나 힘과 같은 우상의 노예가 되는 것에서부터 해방하며 인간의 절대 미래로서의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인 자유와 해방에 대하여 희망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부르심이다.2)
2. 삼차원적 회개
회개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기능적 차원에서 볼 때 삼차원적인 회개3)를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 행사에는 수직적인 행사와 수평적인 행사가 있다. 수평적인 자유 행사란 이미 확립되어 있는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결정이나 선택이다. 반면에 수직적 자유 행사란 인간이 하나의 지평에서부터 다른 지평으로 옮겨가는 대 근거로 삼는 일련의 판단과 결정이다. 여기에서 지평이란, 하늘과 땅이 맞닿아서 둥근 선을 만들어 시야를 막듯이 인간의 시야를 제한하는 한계를 말한다. 인간의 시야가 제한되는 것처럼, 인간의 지식과 관심의 범위도 한정된다. 한 인간의 지평 밖에 있는 것은 그의 지식이나 관심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평 안에 있는 것은 크든 적든 어느 정도 알 수도 있고, 따라서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대상이 된다.
인제 한 사람이 한 지평에서부터 다른 지평으로 옮겨가면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수직적 자유 행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지평은, 그것이 두드러지게 깊이 있고 폭넓고 풍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옛 지평과 그 안에 잠재해 있던 가능성들을 계발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지평에로의 이동이 철저한 전향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전향은 옛 지평의 특징적인 것들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비릇하여 훨씬 더 깊고 넓고 풍부함을 계시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에는 지성적, 윤리적, 종교적인 회개가 있다. 그런데 각각의 회개는 다른 2가지 회개와 관련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 하나가 별개의 사건이며, 따라서 다른 것들과 관련되기 전에 독립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지성적 회개(Intellectual Conversion)란 철저한 정화를 말한다. 사람은 직접적인 세계(오관)에 대한 지식의 기준과 의미로서 전달되는 세계(문화적 공동체적 내외적 체험)를 구별하게 된다. 이 직접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의 기준에 따르면, 실재란 지금 여기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의미로써 전달되는 세계의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니라, 체험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이란 시각적인 기준만이 아니고,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믿음이 복합된 기준이다. 알려져 있는 실재란 그냥 보이는 것만이 아니고, 체험 속에 주어지고, 이해에 의해서 조직되고 보완되며, 판단과 믿음에 의해서 상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인지 과정 특유의 자기 초월을 발견한다는 것은(자기초월의 과정) 흔히 자기의 언어와 사고의 뿌리깊은 습관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때와 자신이 행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남의 간섭을 받는 일 없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고(주체성 확립),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며, 새로운 시작이고, 신선한 출발이다. 이것은 더욱 더 분명한 정화와 발전을 향한 길을 열어 준다.
윤리적 회개(Moral Conversion)는 만족(욕구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치를 위해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성장하고 자유를 획득하며 가치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짐에 따라 교육이나 관습이나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추구하는 실존적인 상황에로 옮아간다. 인제 욕구와 가치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가치를 선택하게 되는 회개의 단계에 이른다. 그러나 윤리적 완성의 단계가 아니기에 편견을 버리고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며 가치의 척도를 살피고 비판에 귀를 기울이며 계속적으로 배울 각오를 해야 한다.
종교적 회개(Religious Conversion)는 궁극적인 문제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은 愛主愛人, 敬天愛人하게 된다. 무조건적이요 무한한 연속적인 역동성으로서의 포기다. 실존적 심연에 흐르는 聖性에로의 소명에 대한 숙명적 수용으로써 기도다.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은총의 선물로서 성 아우구스티노이래 생명의 은총(상존)과 도움의 은총(조력)으로 구분되어 왔다. 생명의 은총은 돌심장을 살심장으로 교체하는 종교적 회개이고, 도움의 은총은 살심장이 자유를 통해서 선행을 할 수 있게 되는 점진적인 운동이다.
3. 자기초월의 양식인 회개
지성적 회개는 인지적인 자기 초월을 통하여 진리에로 향하는 것이고, 윤리적 회개는 실질적인 자기 초월을 통하여 이해되고 확인되고 인식된 가치에로 향하는 것이라면, 종교적 회개는 진리를 추구하는 중에,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중에, 우주를 향하여 우주의 근원과 목표를 추구하는 중에, 자기를 초월하여 모든 자기 초월의 실질적인 근거인 완전한 사랑의 존재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세 가지 회개는 서로를 止揚한다. 지양하는 것은 지양되는 것을 능가하고, 새롭고 독특한 것을 도입하며, 모든 것을 새로운 기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다고 지양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양되는 것을 필요로 하고 포용하며, 지양되는 것의 모든 특징들과 속성들을 보존하고, 그것들이 더욱 풍요로운 상황 안에서 더욱 충분하게 인식되도록 이끌어 간다.
윤리적 회개는 진리를 능가한다. 회개의 주체로 하여금 인지적인 자기 초월로부터 윤리적인 자기 초월로 넘어가도록 촉진시킨다. 그 주체로 하여금 의식의 새롭고도 실존적인 수준에 오르게 하며, 자신을 근원적인 가치로 삼게 한다. 그러나 주체의 진리에 대한 헌신이 방해받거나 약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는 가치에 대해 신중하게 응답하기에 앞서서 현실과 실질적인 가능성을 파악해야 하는 만큼, 여전히 진리를 필요로 한다.
종교적 회개는 윤리적 회개를 능가한다. 지성과 성찰과 숙고를 위한 물음들은 자기 초월에 대한 인간 정신의 욕구와 능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종교적 회개가 실존하는 주체를 사랑하는 주체로, 곧 완전하며, 그래서 내세적인 사랑을 통하여 유지되고 파악되고 소유되는 주체로 변화시킬 때에, 그 주체의 정신적 능력은 실현되고 그 욕구는 기쁨으로 qua한다. 이렇게 되면, 가치를 판단하고 선을 행하는 모든 일을 위한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지성적 회개와 윤리적 회개의 열매들이 부정되거나 감소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오히려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우주적인 상황과 목표 안에 포함되고, 그 상황과 목표에 의해 더욱 촉진되며, 이제는 인간에게 사랑할 능력까지 생기게 된다.
종교적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이나 제한도 없이,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이다. 이 무한함은, 비록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인간적 특징에 상응하는 것이기는 하더라도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聖性은 진리와 윤리적 선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자원을 가진다. 그것은 곧 내세적인 성취, 기쁨, 평화, 至福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의하면, 이것들은 이해할 수없이 신비로운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졌을 때 얻는 열매들이다. 죄도 윤리적인 악과는 다른 완전한 사랑의 결핍이요,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종교적 회개가 윤리적 회개를 지양하고 윤리적 회개가 지성적 회개를 지양한다고 하지만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言)은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이라는 의도적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말에 대한 충실성은 全人의 책임이다.
결론: 1)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지성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완전하게 회개하려고 애쓴다. 지성적으로 회개하지 못하면, 그는 의미로써 전달되는 세계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계 안에서 하신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윤리적으로 회개하지 못하면, 그는 참으로 선한 것을 추구하지 못하고 겉으로 선하게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회개하지 못하면, 그는 희망도 하느님도 없는(에페2,12) 세상에서 철저하게 고독해질 것이다. 2)3가지 차원의 회개가 별개의 것이기는 하지만, 구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호 작용한다. 3)자기 초월을 통해서 일어나는 회개는 사건이기도 하고,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회개이든 그 수행은 한 순간에 성취될 수 없고, 한 가지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보다는 발전적인 입장에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로 주어지고, 공동체 안에서 도움과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성화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선교개념에 있어서 구원의 길은 이전의 생활과 단절을 의미하는 회개와 전체 인간의 완성(성장)이라는 개념이 충돌하고 있었으나, 공의회는 두 견해의 타당성과 상호보완을 강조한다.
선교활동은 또한 인간의 본성 자체와 그 갈망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그리스도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 있는 이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시며 모범이시기 때문이며 또 만민은 이런 새로운 인간성을 바라기 때문이다….실로 우리는 묵은 것에 죽음으로써만 새로운 생명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축복과 동시에 인간의 죄의 표적으로 찍힌 인간과 세상 사물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선교10).
회심자는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풍요로움을 잃는 일 없이 하느님의 구원의 성사라는 새로운 완전체 속으로 통합되어 그 일부가 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렇지만 회심자가 속해 있는 문화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복음이 지니는 구원 능력으로 순화되고 치유되고 변혁되어야 한다.(현대의 복음선교 20) 진정한 복음화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할 뿐만이 아니라, 회심자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완숙한 경지’(에페 4,13; 로마 8,29)에로 이끌어 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회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들어감으로써 구체화되고(현대 복음선교 23), 회개와 세례는 구원의 새로운 질서에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 된다(사도 2,38.42.47; 1고린 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