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성사-교의사적 전개(결혼을 적대시하는 )

 



3.  교의사적 전개




3.1. 결혼을 적대시하는 思潮와의 다툼 (고대)


고대에 서로 심하게 상반된 사조들의 움직임은 교부들을 여러 방면으로부터 방어 태세로 내몰았다.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규범을 무시하며 성을 남용하였는데, 이는 성전매음을 통해서 종교적으로 합법화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는 무감각, 무열정을 이상으로 삼고 자연적인 모든 즐거움을 불신하는 스토아적인 윤리와 물질 그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래서 정신을 육체와 대립시키고 성과 결혼을 멸시하던 마니케이즘이 있었다. 초기 신학자들은 성적인 방종에 대해 분명하게 경계를 그었으나, 육신과 즐거움을 적대시하는 사조들과의 다툼에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서 그들은 결혼을 윤리적으로 허락되고 하느님이 원하신 것으로 변호하였으나, 스토아와 마니케이즘의 사상의 영향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밖에도 그들은 결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바울로 사도 이해로 그리스도 교회의 확신이 된 (1고린 7,1 이하. 7-9) 동정 생활에 대한 높은 평가를 연결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다. 그는 성적(性的)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체험한 후 그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마니케이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뻴라지우스와의 대결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뻴라지우스는 반마니케이즘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이에 반대해서 아우구스티노는 원조의 타락으로 부패한 인간은 아무런 죄 없이 자신의 성을 사용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모든 성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죄이지만, 후손을 위해서 허락되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부패가 무엇보다도 육신의 쾌락이 정신을 억압하고 “거의 모든 사고의 날카로움과 깨어있음을 차단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Civ. Dei XIV 16). 여기서 스토아와 마니케이즘의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성서에 의거해서 아우구스티노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좋은 것이다”고 가르친다(De Bono Coni. 3). 결혼의 “좋음”은 결함을 보상하는 세가지 “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신의 (fides), 후손 (proles) 그리고 성사 (sacramentum)이다: “신의는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 이외에 아무도 다른 이와 성관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다. 후손은 아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잘 보살피고 신앙적으로 교육할 것을 요구한다. 성사는 혼인이 파기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다”(De Gen. 9,7 [12]). “성사”는 여기에서 일차적으로는 거룩한 표지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거룩한 의무의 뜻으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노의 큰 권위 때문에 그의 “저울의 이론”(결혼의 선은 성의 결함을 보상한다)과 “성사”와 “불가해소성”과을 동일시한 것이 후대의 혼인신학의 방향을 결정한다.




3.2.  혼인 체결에 관한 교회의 법적 권한의 증가 (중세)


초세기에 교회는 혼인에 대해서 단지 사목적인 관점에서 돌보았지만, 중세에 들어서 차츰 혼인에 대한 법적 규정을 만들게 되었다.


고대교회에는 특별한 혼인 예식을 만들지 않았고 일반 사회의 혼인 예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사제가 신혼부부를 축복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들의 혼인을 교회의 인정과 축복으로써 체결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10년 경)는 “결혼이 육적인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랑과 신부는 주교의 재가를 얻어서 맺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뽈리까르보인들에게 보낸 편지 5,2)고 말한다. 이때에 이미 결혼 당사자 양편의 혼인의사를 결혼성립의 요소로 생각했다. 일찍이(400년경의 증언에 따르면) 혼인 집전이 미사와 결부되었고 이때에 서방교회에서는 사제가 축복의 기도와 함께 신부에게 면사포를 주는 것이, 동방교회에서는 신랑신부가 화환을 바꾸어 쓰는 것이 돋보이는 예절이었다. 하지만 혼인체결에 대한 법적인 규정은 국가에 속한 권한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말기에 국가의 권위가 쇠퇴하고 주교들이 공적인 직무를 관장하게 된 것이 교회가 혼인 체결에 법적인 권한을 갖을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10세기경 여자들의 납치 행위가 일상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는데, 교회는 이런 퇴폐상황을 막기 위해서 혼인거행의 공식화를 요구하고 여자에게 동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동의 행위의 공개성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신부의 집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당인 교회 현관 앞에서(in facie ecclesiae) 혼인 동의를 교환하게 하였다. 이런 교회의 노력은 점차로 법으로 규정된다. 假이시도로 교서(847년 경)는 교회에서의 공개된 혼인 체결을 요구하였는데,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라씨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1140년 경)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수록하였다.


12세기 초의 프랑스 북부 도시 랜느(Rennes)에서 사용되던 한 미사경본에 의하면 혼인예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1):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사제는 성당 현관문으로 가서 성수를 신랑신부에게 뿌리고 그들의 결혼의사와 혹시 있을 수 있는 근친조당의 유무와 자유의사에 대한 질문을 하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할 그들의 생활에 대한 교훈을 한다. 그 다음에 사제는 신부의 부모들에게 그들의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라고 요구한다. 끝으로 신랑은 신부에게 지참선물을 주어야 했고 이때에 그에 관한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그는 신부에게 축성된 반지를 반른 손에 끼워주고 재산 형편에 따라 금이나 은을 보내야 했다. 사제의 축복후에 신랑과 신부는 성당으로 인도되었는데, 그들은 촛불을 켜들고 들어가서 미사때 제물로 바쳤다. 주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전에 바치는) 부속기도 후 사제가 신혼부부에게 면사포나 수건을 씌워주며 그들을 강복하였고, 신랑에게 평화의 친구를 하면 신랑은 자기 신부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중세 내내 교회 내에서의 결혼을 혼인의 유효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비밀로 맺어진 혼인도 유효하였다. 그 배경에는 혼인은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랑 신부가 자유로이 공표한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교회도 이 동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의가 혼인을 실현한다(consensus facit nuptias)”는 이 원칙은 로마법에서 유래되었는데, “혼인은 동침을 통해서 성립된다”는 프랑크 제국의 법이해와 오랜동안 서로 충돌상태에 있었다. 마침내 타협안이 이루어지고 이는 교황 알렉산더 3세(1159-1181), 이노첸스 3세(1198-1216), 그리고 그레고리오 9세(1227-1241)에 의해서 승인되었다: 동의를 통해서 혼인은 유효하게 되고(matrimonium ratum), 동침을 통해서 불가해소적으로 된다(matrimonium consummatum).


그러나 비밀로 체결된 혼인의 부작용과 폐해가 점차 심해지게 되었다. 비밀 결혼을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와 공개적으로 혼인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증거의 부족으로 교회의 혼배를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간음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명시적으로 비밀 혼인 체결을 금지하고 사제들에게 혼인 장애의 여부를 살필 것을 명령하였다(DS 817). 마침내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교회의 혼인 체결 형식을 준수할 것을 의무화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혼인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혼인 형식의 의무: DS 1813-1816 참조). 그 이후로 가톨릭 신자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교회에서 규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 것만이 유효하고 적법한 혼인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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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3.  교의사적 전개


    3.1. 결혼을 적대시하는 思潮와의 다툼 (고대)

    고대에 서로 심하게 상반된 사조들의 움직임은 교부들을 여러 방면으로부터 방어 태세로 내몰았다.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규범을 무시하며 성을 남용하였는데, 이는 성전매음을 통해서 종교적으로 합법화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는 무감각, 무열정을 이상으로 삼고 자연적인 모든 즐거움을 불신하는 스토아적인 윤리와 물질 그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래서 정신을 육체와 대립시키고 성과 결혼을 멸시하던 마니케이즘이 있었다. 초기 신학자들은 성적인 방종에 대해 분명하게 경계를 그었으나, 육신과 즐거움을 적대시하는 사조들과의 다툼에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서 그들은 결혼을 윤리적으로 허락되고 하느님이 원하신 것으로 변호하였으나, 스토아와 마니케이즘의 사상의 영향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밖에도 그들은 결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바울로 사도 이해로 그리스도 교회의 확신이 된 (1고린 7,1 이하. 7-9) 동정 생활에 대한 높은 평가를 연결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다. 그는 성적(性的)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체험한 후 그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마니케이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뻴라지우스와의 대결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뻴라지우스는 반마니케이즘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이에 반대해서 아우구스티노는 원조의 타락으로 부패한 인간은 아무런 죄 없이 자신의 성을 사용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모든 성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죄이지만, 후손을 위해서 허락되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부패가 무엇보다도 육신의 쾌락이 정신을 억압하고 “거의 모든 사고의 날카로움과 깨어있음을 차단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Civ. Dei XIV 16). 여기서 스토아와 마니케이즘의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성서에 의거해서 아우구스티노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좋은 것이다”고 가르친다(De Bono Coni. 3). 결혼의 “좋음”은 결함을 보상하는 세가지 “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신의 (fides), 후손 (proles) 그리고 성사 (sacramentum)이다: “신의는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 이외에 아무도 다른 이와 성관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다. 후손은 아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잘 보살피고 신앙적으로 교육할 것을 요구한다. 성사는 혼인이 파기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다”(De Gen. 9,7 [12]). “성사”는 여기에서 일차적으로는 거룩한 표지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거룩한 의무의 뜻으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노의 큰 권위 때문에 그의 “저울의 이론”(결혼의 선은 성의 결함을 보상한다)과 “성사”와 “불가해소성”과을 동일시한 것이 후대의 혼인신학의 방향을 결정한다.


    3.2.  혼인 체결에 관한 교회의 법적 권한의 증가 (중세)

    초세기에 교회는 혼인에 대해서 단지 사목적인 관점에서 돌보았지만, 중세에 들어서 차츰 혼인에 대한 법적 규정을 만들게 되었다.

    고대교회에는 특별한 혼인 예식을 만들지 않았고 일반 사회의 혼인 예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사제가 신혼부부를 축복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들의 혼인을 교회의 인정과 축복으로써 체결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10년 경)는 “결혼이 육적인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랑과 신부는 주교의 재가를 얻어서 맺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뽈리까르보인들에게 보낸 편지 5,2)고 말한다. 이때에 이미 결혼 당사자 양편의 혼인의사를 결혼성립의 요소로 생각했다. 일찍이(400년경의 증언에 따르면) 혼인 집전이 미사와 결부되었고 이때에 서방교회에서는 사제가 축복의 기도와 함께 신부에게 면사포를 주는 것이, 동방교회에서는 신랑신부가 화환을 바꾸어 쓰는 것이 돋보이는 예절이었다. 하지만 혼인체결에 대한 법적인 규정은 국가에 속한 권한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말기에 국가의 권위가 쇠퇴하고 주교들이 공적인 직무를 관장하게 된 것이 교회가 혼인 체결에 법적인 권한을 갖을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10세기경 여자들의 납치 행위가 일상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는데, 교회는 이런 퇴폐상황을 막기 위해서 혼인거행의 공식화를 요구하고 여자에게 동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동의 행위의 공개성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신부의 집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당인 교회 현관 앞에서(in facie ecclesiae) 혼인 동의를 교환하게 하였다. 이런 교회의 노력은 점차로 법으로 규정된다. 假이시도로 교서(847년 경)는 교회에서의 공개된 혼인 체결을 요구하였는데,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라씨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1140년 경)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수록하였다.

    12세기 초의 프랑스 북부 도시 랜느(Rennes)에서 사용되던 한 미사경본에 의하면 혼인예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1):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사제는 성당 현관문으로 가서 성수를 신랑신부에게 뿌리고 그들의 결혼의사와 혹시 있을 수 있는 근친조당의 유무와 자유의사에 대한 질문을 하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할 그들의 생활에 대한 교훈을 한다. 그 다음에 사제는 신부의 부모들에게 그들의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라고 요구한다. 끝으로 신랑은 신부에게 지참선물을 주어야 했고 이때에 그에 관한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그는 신부에게 축성된 반지를 반른 손에 끼워주고 재산 형편에 따라 금이나 은을 보내야 했다. 사제의 축복후에 신랑과 신부는 성당으로 인도되었는데, 그들은 촛불을 켜들고 들어가서 미사때 제물로 바쳤다. 주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전에 바치는) 부속기도 후 사제가 신혼부부에게 면사포나 수건을 씌워주며 그들을 강복하였고, 신랑에게 평화의 친구를 하면 신랑은 자기 신부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중세 내내 교회 내에서의 결혼을 혼인의 유효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비밀로 맺어진 혼인도 유효하였다. 그 배경에는 혼인은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랑 신부가 자유로이 공표한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교회도 이 동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의가 혼인을 실현한다(consensus facit nuptias)”는 이 원칙은 로마법에서 유래되었는데, “혼인은 동침을 통해서 성립된다”는 프랑크 제국의 법이해와 오랜동안 서로 충돌상태에 있었다. 마침내 타협안이 이루어지고 이는 교황 알렉산더 3세(1159-1181), 이노첸스 3세(1198-1216), 그리고 그레고리오 9세(1227-1241)에 의해서 승인되었다: 동의를 통해서 혼인은 유효하게 되고(matrimonium ratum), 동침을 통해서 불가해소적으로 된다(matrimonium consummatum).

    그러나 비밀로 체결된 혼인의 부작용과 폐해가 점차 심해지게 되었다. 비밀 결혼을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와 공개적으로 혼인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증거의 부족으로 교회의 혼배를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간음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명시적으로 비밀 혼인 체결을 금지하고 사제들에게 혼인 장애의 여부를 살필 것을 명령하였다(DS 817). 마침내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교회의 혼인 체결 형식을 준수할 것을 의무화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혼인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혼인 형식의 의무: DS 1813-1816 참조). 그 이후로 가톨릭 신자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교회에서 규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 것만이 유효하고 적법한 혼인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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