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사의 인간학적 기반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란 “거룩한 것의 표징이며,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형태”(DS 1639)라고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은총을 전해주는 보이는 표징이 성사라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도록 표현되는 성사의 특성은 7성사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서, 인간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2.1. “성사적” (=상징적) 존재인 인간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따로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육체는 일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육체의 일체적인 구조 속에 사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자신의 몸짓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서 마음 속의 기쁨을 웃음으로 드러내고, 마음 속의 슬픔을 울음으로, 분노를 불끈 쥔 주먹으로 나타낸다.
인간 상호 간의 통교(communication)도 이런 구조로 이루어진다. 즉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하거나 얼싸안는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 흔히 손을 맞잡거나 어깨를 감싼다. 좋아하는 마음은 이러한 동작 외에도 물건을 통해서도 표현되기도 한다. 즉 선물(꽃, 반지), 식사 초대등을 통해서 호의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몸짓이나, 물건은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다른 무엇을 가리킨다. 즉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도록 표현하는 표징,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담은 상징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일의 시인 중에 릴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젊었을 때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얼마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릴케는 매일 정오 경에 젊은 여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산보하였다. 그런데 그가 산보하는 길 중간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할머니가 쭈구리고 않아서 동냥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구리고 나무가지처럼 마른 손만 앞으로 내밀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돈을 얹어 주면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챙겨 넣었다. 릴케와 함께 산보하는 여인은 항상 동전을 준비했다가 그 할머니에게 주었다. 그런데 정작 릴케는 아무 것도 주지를 않았다.그 여인이 이상하게 여기다가 물어보았다. ‘저 불쌍한 할머니에게는 어째서 아무 것도 줄 생각을 하지 않느냐’. 릴케는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사람들은 저 할머니의 손에다 돈을 쥐어 주지만 나는 저 사람의 가슴에 무엇을 주고 싶다.’ 며칠이 지난 다음 릴케가 여느날처럼 산보하러 나오는데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왔다. 서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물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속으로 ‘아, 이제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려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산보를 하면서도 장미를 줄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언제나 그 장미를 주려나 기대를 하면서 거지 할머니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릴케는 장미를 그 할머니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어 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감촉이 이상하니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더니 장미였다. 그러더니 장미를 내민 릴케의 손을 잡고는 서서히 일어서서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 장미를 갖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는 며칠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예전과 똑 같은 모습으로 동냥을 하는 것이었다. 릴케의 연인은 그 할머니가 동냥을 하지 않았던 며칠동안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궁금해서 릴케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릴케는 ‘장미의 힘으로!’라고 대답했다.
릴케가 거지 할머니에게 준 장미는 꽃가게에 있는 장미들과 겉보기로는 똑 같았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아주 다르다. 마음이 실려있는 장미이다. 릴케는 아마도 이런 마음을 그 장미에 담아 주었을 것이다. ‘할머니, 당신은 지금 초라하고 보잘 것없게 동냥을 해서 살고 있지만, 당신의 영혼은 그렇게 초라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부모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고, 친구의 아낌을 받았었고, 아직도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뜻을 거지 할머니는 즉시 알아들었고, 그런 뜻이 담긴 장미 한송이는 봄비가 굳은 땅을 적셔 부드럽게 하듯이 그의 메마른 마음을 적셔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단 며칠 동안이라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릴케가 거지 할머니에게 전한 장미는 꽃가게에 놓여진 여느 장미와는 분명 달랐다. 그 장미는 릴케의 안 보이는 마음을 보이게 표현한 상징이었고,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2.2. 세상만물이 “성사”
교회의 성사(聖事)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즉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보이는 상징, 표징인 것이다. 장미 한 송이로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듯이 하느님도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따뜻한 마음을 담은 릴케의 장미가 여타의 장미와는 구분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는 그냥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가 된다. 이렇게 인간학적인 배경에서 성사를 고찰한다면, 교회의 성사가 그렇게 낯설거나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사는 결코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나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갖혀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며 그 구성 요소이다. 브라질의 신학자 보프(L.Boff)는 인간학적인 맥락에서 성사를 고찰하면서 성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상의 한 사물이 – 여전히 세속적인 채로 – 또 다른 하나의, 그 자신과는 다른 것을 상기시킬 때마다 그것은 성사적 기능을 띤다. 물건이기를 그치고 표징 내지 상징이 된다. 무릇 표징이란 무엇인가의 표징 내지는 누구인가를 위한 가치이다. 물건으로서는 전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표징으로서는 그러나 비상한, 실로 한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1)
보프는 이런 관점에서 세상 모든 것이 상징, 즉 “성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얘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알루미늄의 물잔이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별 가치가 없는듯 하지만, 그 가정에서는 가족의 역사가 담긴 소중한 물잔으로서 표징의 역할을 한다. 다른 예로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피우다 남긴 담배꽁초는 그 자체로 그저 지푸라기 뭉치에 불과하지만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소중한 것이다, 즉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기시키고 ‘현존’케 하는 “성사적” 역할을 한다.2)
이런 관점은 상징이란 말마디의 서양말 symbolum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단어는 희랍말의 συμβολον(symbolon)이란 명사에서 유래한다. 이 명사는 συμβαλειν(symbalein)즉 ‘함께 던지다’, ‘함께 맞추어 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마디이다. 상징이라는 그 원래의 말마디의 뜻은 어떤 사물, 예를 들어서 반지나 거울을 두 조각으로 내어 그 한 조각에 다른 조각을 맞추어 봄으로써 우정이나 계약의 상대편을 식별하게 하는 표지이다. 즉 반지나 거울은 우정과 계약을 생각케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원에서 유래하는 상징이란 말마디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이 다른 어떤 것을 드러내어 주는 것을 통칭하게 되었다. 이 상징은 아주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어떤 볼 수 있는 사물이 다른 어떤 사물이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 상징은 어떤 볼 수 있는 사물이 ‘정신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것’을 드러내고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을 말한다.3)
2.3. 마음의 눈
프랑스의 작가 쌩 떽쥐뻬리(Antonie de Saint-Exupéry)가 지은『어린 왕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나의 비밀이야’라고 여우는 말하였다. ‘그것은 아주 간단해: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잘 볼 수 있어. 본질적인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어’. ‘본질적인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어’라고 되풀이 하면서 어린 왕자는 그말을 기억하려고 하였다.”
쌩떽쥐뻬리가 사용하는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는 비유적인 표현은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자명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여러 방식으로 이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외적인 인식과 내적인 인식, 피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이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보지 못하지만 참을성 있게 애정을 갖고 다가서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마음의 눈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마음의 눈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런 마음의 눈을 지닌 분이라고 하겠다. 마태 6,25-34에 보면 예수께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권고와 함께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보잘 것 없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새들과 들꽃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읽으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사물이나 사건이 보여주는 외적인 것 이상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을 지니신 분이라고 하겠다. 세상 만물이 자신을 넘어선 무엇을 가르키는 성사적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혹은 ‘신앙의 눈’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상에서 인간과 세상 만물이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상징적, 성사적 실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인간과 세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가 성사적 구조를 지닌다. 이하에서는 구세사의 성사적인 구조에 살펴보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