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한] 落胎 [라] abortus [영] abortion [관련] 임신중절

낙태는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일어날 경우(abortus provocatus)와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이 자연적으로 일어난 경우(abortus spontaneus)의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문제는 아직 생존능력이 없는 미숙한 태아의 살해라는 점에 있으며, 위의 두 가지 중 앞의 것에 두드러진 문제점이 따르게 마련이다. 범죄로서의 낙태와 의학적인 임신중절과의 구별은 긴급할 때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수술이 무죄로 인정되고 있는 이상, 단순한 형법상의 의의를 갖고 있을 뿐이다. 도덕상으로는 이와 같은 구별은 정상이 무겁다거나 가볍다는 차이밖엔 없는 것이며, 이런 행위가 도덕상 용납될 수 없다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문화 속에서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윤리적인 결정들 중, 이 낙태문제만큼 기본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있어 커다란 복잡성이 뒤따라 얽히는 문제는 없다. 우리가 낙태문제에 대하여 내린 결단은 그 선택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구과잉 및 임박한 식량부족, 그리고 어린이를 부담시하는 잘못된 결혼관 등과 같이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예측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성서적인 지침에 나타난 기본적이고 신학적인 원리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성서에 비추어 보면, 자궁 속에 있는 생명은 반드시 인격적 존재의 견지에서 생각되어져야 하며, 법에 있어서는 어머니나 또는 그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이, 혹은 양쪽 모두 다치게 하였을 경우에 적용되도록 만들어져 있다(출애 21:22-24). 태아의 생명은 하느님 앞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하느님은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그러한 태아의 생명도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시편 139:16, 1디모 2:4).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요, 인간은 영생을 위해 창조되었다. 생명은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창조주와 영구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창조주의 뜻은 그의 창조물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면전에서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의지에 불복하여 왜곡시키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인간생명의 시초를 자기 마음대로 단축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임신기간 동안, 태아의 생명이 어머니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두 존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따르게 되는데, 이 때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은 한 명의 발육된 인간으로서의 이미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생명을 구해야만 한다는 데 있다. 어머니의 생명이 태아의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그런 상황에서 행해지는 낙태는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취해지는, 간접적이고 불행한 결과이다. 이러한 경우에 적용돼 왔던, 두 가지 죄악 중에서 덜한 편을 택한다는 윤리적 원리는 의학적 징후의 완전한 극복, 즉 태아 쪽도 살릴 수 있다는 치료의 모든 가능성이 찾아질 때 자동적으로 폐기될 것이다.

우리가 낙태문제에 대해 적절한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 중요시해야 할 요인으로서는 성취에 대한 문제도 있다. 인간 생명은 성취를 위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보다 완숙한 생의 성취는 자기중심적 쾌락을 바라는 욕구 혹은 편익에 대한 관심이나 안락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아이가 재정적인 압박을 초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가능성 자체만으로는 태아의 생명을 유산시키고자 하는 데 대한 만족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사회적인 궁핍은 사회위생, 사회보장, 사회정책 등의 수단을 통해 극복되어져야 할 일이지, 결코 태아의 살해로써 극복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태를 포함한 모든 형식의 피임은 단순히 사회적 궁핍을 확대하며 그것을 영속화시킬 따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적인 징후로서의 낙태문제를 볼 때는 순수한 ‘살인허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필립 1:21-24).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결정으로 인간생명을 종식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는 명예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 때, 어머니가 자살할 위험성이 있을 때, 혹은 폭행, 능욕, 근친상간, 종족능욕 등의 범죄행위의 결과로 임신했을 때, 윤리적인 근거에서 영아 살해의 권리가 요구되어져 온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덕파괴에서 빚어진 결과를 다시 도덕률(道德律)의 새로운 파괴로써 제거하려고 한다면, 이는 윤리의 본질을 잘못 인식한 데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피임문제를 토의할 때 ‘자연법’의 이론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 수백년 동안 가톨릭 윤리신학자들은, 현대 윤리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연법 학설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교회가 특수 윤리문제에 있어 엄밀한 의미상의 자연법 학설을 적용한 유일한 분야는 예컨대, 피임, 단종, 수음, 이식 등 혼인문제와 의학윤리의 분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현대세계의 사목현장>에 따르면, 교회로서는 생명 전달에 관한 하느님의 법과 진정한 부부애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법 사이에 참된 모순이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면서, “낙태와 유아살해는 가증할 죄악”이라고 언급한 뒤, “교회의 자녀들은 산아조절에 있어서 하느님의 법을 해석하는 교권(敎權)이 금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과 생명전달의 임무는 현세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세의 관점에서만 평가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목적과 관련시켜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 임신중절

[참고문헌] John T. Noonan, Jr., Contraception: A History of its Treatment by the Catholic Theologians and Canonists, Cambridge, Mass. 1965 / DCE 1=Car1 F. Henry,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Canon Press, 1973 / 兪鳳俊, 倫理神學에 있어서 自然法의 位置, 가톨릭 大學論文集, 第3輯, 가톨릭大學神學部, 1977 / 사목헌장, 제2부 제1장 / 교황 바오로 6세, 산아조절에 관한 회칙,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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