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중기 이후 서방교회에서 일어난 이교(Schisma, 교회일치를 깨뜨리는 분리)의 원인이 된 노바시아노적 엄격주의를 가리킨다. 로마황제 데치우스(Decius)에 의한 대박해(249~250년)때 이교(異敎)에 타협한 그리스도 교도들(lapsi) 중에, 박해 종식 후 교회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자가 많이 나타났다. 이 때 교회가 이를 쉽사리 허락한 데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발생한 것으로, 충분한 회개를 한 후가 아니면 복귀는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일단을 지도한 초기의 중심인물은 로마의 노바시아노(Novatianus)였다. 그는 기교자(棄敎者)의 복귀문제에 관해서, 처음에는 치프리아노(Cyprianus, 툴롱의~)와 마찬가지로 다소간 융통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르넬리오(Cornelius)가 로마 주교(교황)로 선출되어(251년) 완만한 태도로 이 문제를 처리한 것과 양자간의 개인적인 대립문제도 다소간 얽혀서, 고르넬리오의 견해와 처치에 반대하여 이와 대립하였다. 노바시아노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를 지지하는 단체에 의해 대립 주교(대립교황)로 추대되었으며, 이에 대해 고르넬리오는 그의 추방을 선언함으로써 시스마가 발생하였다. 노바시아노주의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파비아노(Fabianus)에 의해 지지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Dionysius)는 이를 격렬히 반대했으며, 치프리아노도 로마 주교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노바시아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했으나(257/258), 이 단체는 자기네야말로 참으로 ‘깨끗한 무리’ (Cathari)라고 주장, 특히 동방에 많은 지지자를 얻어, 사상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이라 해서 가톨릭 교회의 배척을 받았다. 니체아공의회는 그들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앙을 정통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시스마활동을 비난하고, 교회와의 화해를 호소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제국내의 평화를 원하면서 이 파의 지도자 아체시우스(Acesius)를 견책했고(325년),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박해를 더욱 강화하였다(412년). 그러나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5세기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았으며, 동방교회권에서는 7세기 말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A. d’Ales, S. J., Novatien, Etude sur la theologie romaine au milieu du troisieme, siecle, 1924 / F. Schiedeweijer, Novatian und die Engelchristologie, Z.K.G. 66, 1954 / 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