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침묵교회 교구의 하나.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교구. 1922년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리되고 조선 대목구에서 원산(元山) 대목구를 떼어내어,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 중인 독일의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함경남북도와 만주 북간도(北間島) 지방의 포교사업을 맡게 하였다.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요청에 따라 이미 1909년에 서울에 진출해서, 백동(柏洞, 지금의 惠化洞)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사범학교와 직업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원산 대목구를 새 포교지역으로 담당하게 된 베네딕토회에서는, 1921년 5월 1일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 신부가 주교로 승품되어 포교 중심지를 원산 가까이의 덕원(德源)으로 정하고, 우선 새 수도원과 신학교 그리고 공장들의 건립에 착수하였다. 1927년 수도원과 신학교 건물이 준공되자 1927년 서울에 남아 있던 신부들과 신학생들이 서울을 완전히 철수하여, 덕원으로의 이전이 끝났다. 이에 본격적으로 포교사업을 전개한 원산대목구는 날로 교세가 신장되어, 1928년 7월 19일에는 간도지방을 위해 연길(延吉) 지목구를 설정 독립시켜, 이미 이곳에 진출하여 포교 중이던 같은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원에게 위임하였다. 이어 1940년 1월 12일에는 덕원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몇몇 본당을 교황청 직속의 면속구(免屬區)로 분리 독립시키는 동시에, 종래의 포교지인 원산 대목구를 함흥(咸興) 대목구로 개칭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인 주교에게 넘겨주기로 하였으나, 우선은 덕원의 수도원장이 관리하게 되었다.
덕원면속구는 원산을 포함하여 불과 4개 본당으로 구성되어 수도원 주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그 범위가 좁아 집중적으로 사목할 수가 있어 급속히 성장하였고, 더구나 교구에서 경영하는 공장, 병원, 인쇄소 등은 교구 발전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구에도 도움을 주어 천주교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1945년 민족해방과 더불어, 불행히도 한반도의 북반부가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수도원은 1949년 5월 9일 공산정권에 의해 몰수당하고,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부와 수사, 수녀들이 감금당하여, 갖은 고난 속에서 혹은 감옥에서 죽고,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우어 주교를 잃은 그들은 1952년 5월 9일에 비테를리(Bitterli, 李) 신부가 교구장서리로 임명되고, 그 해 7월 7일에 경상북도 왜관에 수도원이 설립되자 다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왜관수도원은 후에 한국인 신부에 이양되었다. 현재 왜관 대수도원 대원장인 이동호 아빠스가 함흥교구와 덕원 면속구의 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고 있다.
[참고문헌] A. Kaspar, P. Berger, Hwan GAB 60 Jahre(還甲) Munterschwarzach 19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