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道)의 의미 : 도의 뜻은 넓고도 풍부하다. 서양의 logos와 인도의 Dharma처럼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다. 그 ‘도’자의 자원(字源)을 살펴보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도란 다니는 길이다. 다니다와 머리로 구성되어 있다”(-所行道也, 從辵從首)라고 하였다. 착(辵)자는 ≪설문≫(說文)에서 또 “가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한다”(乍行乍止)고 하였다. 유희(劉熙)는 석명(釋名)에서 “도는 밟는다(蹈)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고문의 ‘도’자의 형태는 도(導, 인도한다)자와 가깝다. 그러므로 도는 처음엔 인도한다는 도(道)와 밟는다는 도(蹈)의 의미로 쓰였다. 이것은 대체로 사람의 머리[首]는 그 발[足]의 가고 멈춤(行止, 즉 辵)을 인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정복보(丁福保)는 ≪설문고림≫(說文詁林)의 ‘도’자 아래에 ≪설문고류보≫(說文古-補)에 기재된 금문(金文)을 인용하였는데 ‘도’자는 ‘-’이라고 하였다. 이 금문 중에서 ‘수’의 사방(四旁)은 바로 행(行)자로서 길[道路]의 모습이다. ‘도’자는 역시 길을 뜻하였다. 그러나 그 속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다. 도는 발로 가야만 하지만 머리로 잘 생각해서 내디뎌야 한다. 머리는 몸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므로 ‘수’(首)자는 존경된다는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도’자의 자원이 인간의 머리[首]와 발로 걸어 감[足]이기 때문에 머리는 스스로 길 위로 걸어가는 것[行]을 인도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머리는 그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멀리 내다보고 그 몸과 그 발을 이끌어 준다.
2. 길은 어디에나 통하여 있다. 그러므로 ‘도’자는 통달(通達)로도 풀이된다. ≪설문≫에서 “통달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達之謂道)고 하였으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는 “도는 통하여 하나로 된다”(道通爲一)고 하였고. 양웅(楊雄)의 ≪법언≫(法言)에서는 “도란 통(通)이다.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장횡거에 의하면 “만물에 두루 통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通萬物而謂之道)[≪正蒙≫ 乾稱篇]. 이와 같이 통달로써 도를 말하였는데, ‘통’의 의미도 심감천(-甘泉)에 의하면, 첫째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통틀어서 하나로 묶는다. 즉 총괄한다[總括之義]. 둘째 막힌 것을 터 주고 맺힌 것을 풀어 준다[疏解之義]. 셋째 꿰뚫는다[貫穿之義]. 넷째 마음으로 깊이 느껴서 깨닫는다[感梧之義]는 여러 가지 뜻을 갖게 되었다[≪理學格物通≫]. 따라서 통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도도 위의 네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도는 텅 비어 아무런 형체도 없는 것[無形] 같지만, 만물이 다 거기에서 유래한다[所共由]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즉 길[道]은 어디나 통하여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그 길을 거쳐서[由]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나의 길은 하나로 꿰뚫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을 때 그가 걸어간 길은 오직 한 길 뿐이었으나 그 길은 어디에도 통하는 길이었다. 이와 같이 도는 거쳐야 할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뜻뿐만 아니라 환하게 뚫려 있다는 허통(虛通)의 의미도 갖고 있다.
3. 우리의 어떤 활동이건 일정하게 따라야 할 길이 있고 이것은 서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안다[知]와 말한다[說]는 뜻이 파생되었다. 중국어로 어떤 것을 아는 것을 일러 ‘지도료’(知道了)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일러 ‘모인도’(某人道)라고 한다. 그러면 어째서 그냥 ‘지료’(知了)하지 않고 ‘지도료’(知道了)라고 하며, 말하는 것을 도라고 하는가? 인간이 알고 말하는 활동의 진행에는 역시 따라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 그 길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전달하였을 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알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길을 방법 또는 방식(方式), 양식(樣式), 법칙(法則), 규칙(規則), 준칙(準則) 등으로 확대해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에서 이치[理] · 진리 · 이법(理法)의 의미까지 파생되어 나왔다. ‘지도료’에서의 앎은 그간 막혔던 길을 터 주는 것뿐 아니라 헝클어져 맺혔던 가닥[條理]을 풀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모두 길을 통하여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 길을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말[言語]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말한다는 것은 도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도를 전부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노자(老子)는 그러므로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言可道 非常道)라고 하였다. 도는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니고, 아무 말 없는 가운데서도 알 수도 있기[黙而識之]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이 뜻[意]을 통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기[言不盡意] 때문에 선종(禪宗)은 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침묵으로 깨우쳐 준 사례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4. 서로 통하는 길에는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다. 지나가는 곳이 많으면 멀고, 지나가는 곳이 적으면 가깝다. 뿐만 아니라 길에는 큰 길[大道]과 작은 길[小道]이 있으며, 곧은 길[直道]과 굽은 길[曲道]이 있다. 많은 사람과 동물, 수레들이 함께 다니어 그 길 위에 많은 사람과 동물, 수레들이 있는 길은 큰 길이요, 그 반대는 작은 길이다. 사람과 수레들이 다니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이 곧장 도달할 수 있는 길은 곧은 길이요, 거치적거리는 것이 많아 구불구불 가는 길을 굽은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멀고, 크고, 곧은 길을 도라고 하지만 가깝고, 좁고, 굽은 길을 술(術)이라고 한다. 또 길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도 있다. 이와 같이 통할 수 없는 길을 비도(非道)라 한다. 인간과 사물이 의존하는 길에는 어떤 때 어떤 곳에는 통하다가 통하지 않을 경우도 있으며, 한 사람에겐 통하다가 다른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길도 있다. 또 소수인 에게는 통하지만 국가, 천하와 큰 우주에게까지는 통할 수 없는 길도 있다. 그 길이 작은 사람에게만 통하면 소인(小人)의 도요, 큰 사람에게 통하는 도는 대인(大人)의 도다.
5. 길은 누구나 다 거치지만, 그 길은 처음엔 누군가 다녀서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莊子≫]. 다시 말해 산에 있는 오솔길이 단단하게 다녀진 것도 그 길을 늘 다녀서 이루어진 것이다(山徑之蹊介然 用之而成路). 우리는 이미 나 있는 길을 처음으로 찾아 낼 수도 있으나, 사람들이 길을 내는 경우도 있다. 앞의 것을 도의 발견이라 한다면, 뒤의 것을 도와 창성(創成)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후자를 강조하여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人能弘道 非通弘人)[≪論語≫]라고 하였다. 도가 인간에게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면 그 도는 아주 옛날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있는[常存] 것이며, 도가 인간에 의해 창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도는 시대 시대마다 언제나 새로운[常新] 것이다. 도는 영원불멸하게 존재하면서도 언제나 짧게 이루어지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6. 길은 수단으로 사용될 때도 있고, 목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고속도로는 차를 빨리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지만, 고궁 속에 있는 길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니는 곳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생활의 수단[道]이 되는 것이지만,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道]이 된다. 그러나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목적이 수단에 사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사람이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도리(목적)인 동시에 하늘나라[天堂]에 오르기 위한 길(수단)로도 볼 수 있다. 또 어떠한 수단도 목적에 의해 관철되었을 때 그 자체가 목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궁극적인 묵적을 가지고 결코 수단으로는 삼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목적의 도를 동양철학에서는 경도(經道) 또는 구경도(究境道)라고 하고, 이 경도를 실현하는 공부 또는 수단의 도를 권도(權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 한다. 그러면 최후의 목적이 되는 도는 무엇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수단의 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마다 또 철학자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일한 길[道]을 걸으면서도 한 사람은 그것을 목적의 도로 여기는데, 다른 한 사람은 수단의 도로 여길 수도 있다. 인간은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자기가 걸어 온 길이 아닌 것을 서로 배척하게 되고 여기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논쟁하는 가운데서 각자는 그가 생각하는 도가 비도가 아님을 스스로 따져서 밝혀야[辯明] 한다. 이와 같이 서로 따지고 밝히는 과정에서 서로 알게 되고 서로 만나게 되는 길이 생긴다.
특히 철학에서 서로 따지고 밝히는 논쟁이 많은 것은 철학이 최대 최고의, 가장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진리 또는 도를 추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최대 최고의 또는 하나뿐이며 둘을 허용치 않는다. 그런데 도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같지 않으면 반드시 서로 논쟁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것은 최고 최대의 도가 되지 못하고, 그보다 한 단계에 낮은 도가 되며, 이 또는 하나뿐 아니라 많이 있게 된다. 이 많은 도를 모두 하나로 통관(統貫)하는 도가 최고 최대의 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 사상에서 최고 최대의 도를 추구하려는 이는 언제나 논쟁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논쟁 중에서 스스로 따져지고 스스로 밝혀져 그 도가 서로 만나게 됨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논쟁은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도가 함께 존재하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道並行而不相悖) 세계에서 공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술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사는(人相忘於道術) 경지에서 노닐게 된다.
7. 도가 최대 최고의 것으로서 어디에도 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제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제한을 받게 되면 이 제한 때문에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때문에 도는 천(天) 또는 인(人)으로 규정하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구별이 생겼다. 그리하여 도가(道家)는 전자에, 유가(儒家)는 후자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① 공자(孔子)의 도 :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논어≫]고 할 정도로 궁극적 진리 탐구에 열성을 가졌다. 그가 그토록 듣기 원하였던 도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공자는 또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는데 그 도는 증자(曾子)의 해석에 의하면, 충서(忠恕)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仁)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었다. 맹자(孟子)는 이를 계승하여 인간의 착한 마음[仁心]에 의하여 행위하였을 때 비로소 정도(正道)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도(非道)라고 하였다. 맹자는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까닭은 지극히 적지만[幾希] 그 적은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고유하게 가진 것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이다. 이 본성은 인심(仁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인(仁)은 사람의 마음(人心)”이라고 하였고, ‘인’이 인간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이 본성에 의하여 행위하는 것이 인도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인이란 곧 사람됨이다. 합해서 그것을 말하면 도이다”(仁也者人也 合而言之 道也)[≪盡心篇≫]라고 하였고, ≪중용≫(中庸)에서는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率性之謂道)고 하였다. 그러니까 공맹(孔孟)이 말한 도는 ‘인도’이다. 그래서 맹자는 “도는 둘이다. 인과 불인(不仁)일 뿐이다”(道二, 仁與不仁)[≪雜婁≫]라고 했으며 이 ‘인도’라는 표준을 세워 놓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이 ‘인도’가 정치에 응용되면 군신지도(君臣之道)가 되며 가정에 적용되면 자도(慈道), 효도(孝道)가 되며 사회에 활용하면 붕우지도(朋友之道)가 된다.
② 노장(老莊)의 도 : 도는 노자, 장자의 철학 세계의 최고 개념이다. 그 도는 자연(自然)이라는 의미로서의 천도(天道)로서 본체론적, 우주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노자는 천지만물로서 도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상명(常名)이 아니다. 무명(無名)은 천지(天地)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모체(母體)이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도덕경≫]. 인간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상도는 자연의 천지만물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 인간의 일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 도는 천지 만물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며 만물의 창생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자는 이 도가 “천지에 앞서서 생겨났으며”(先天地生)[≪도덕경≫ 4장] 천하의 모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둘은 셋을,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42장]고 하였다. 이 도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인위적으로(無爲而無以爲) 천지만물을 창생하지만 만물의 변화는 이 도에 의거한다. 이 도를 일(一), 상(常) 등으로 표현하였다. 도의 움직임은 되돌아오는 것(反者, 道之動)이므로 만물이 극단으로 가면 전화(轉化)되어 원 상태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장자는 노자를 계승하여 도는 깊고도 아득하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夫道, 窅然難言哉)[≪知比遊≫]고 하였으며, 아무런 형체가 없을 뿐 아니라 무궁한 것으로 그 작용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그 도는 어디에나 통하여 있다. 그리하여 서까래와 큰 기둥, 미녀와 추녀는 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로 통하게 되어 상대적인 차별을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도는 있지 않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통해 있다. 그래서 도가 어디 있는가 라는 동곽자의 물음에 장자(莊子)는 있지 않는 곳이 없다(無所不在)고 대답하였다[≪知比遊≫]. 그러면서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근본이 되어 천지가 있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夫道…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大宗師≫]. 이것은 서양철학의 causa sui와 비슷하다. 이 도는 유일한 덩어리로서 결코 분할할 수가 없다(夫道, 未始有封)[≪물론≫]. 장자는 이것을 혼돈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도의 작용은 아무런 의도나 목적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魏晋)시대에 왕필(王弼)과 곽상(郭象)은 노장의 도를 무(無)라고 해석하였다.
③ 가톨릭의 도 : 예수 그리스도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구절에서 길은 곧 도를 말한다. 이는 보편되고 공번된 교회의 길이며 성교(聖敎)의 길이다.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천주의 정도(正道)는 오직 하나뿐(天主正道惟一)이라고 하여 중국에 기존했던 삼교(三敎), 즉 유(儒) · 불(佛) · 도교(道敎)는 제각기 하나는 ‘무’를 숭상하고, 하나는 공(空)을 숭상하고, 하나는 성유(誠有)를 숭상하는데 삼교가 합일(合一)되기는 마치 물과 불을 합치시키려는 것과 같고 또 가르침마다 본래 계율이 같지 않아 한쪽은 살생을 경계하는데, 한쪽에서는 희생을 사용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그렇다면 이 셋을 다 포함한 자는 이것을 지키려면 저것에 어긋난다. 지켰는데 어긋나고, 어긋났는데 지켜지니 어찌 어지러운 가르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삼교를 따르느니 차라리 아무런 가르침도 따르지 않는 것이 낫겠으며, 쫓을 만한 가르침이 아무 것도 없다면, 반드시 따로 바른 길[正路]을 배우지 않고 남을 따라 죽으며 꿈속에서 도를 말할 것인가? 대체로 참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도가 그 참됨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삶을 빛나게 할 수 있으며, 그 하나를 얻지 못하면,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한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도가 안정되지 못하고 도가 안정되지 못하면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는 서문에서 “천주의 도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며, 또 반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주재를 알지 못한다”(天主道在人心 人自不覺 又不欲省 不知天之主宰)고 하였다. (鄭仁在)
[참고문헌] 唐君毅, 原道篇, 中國哲學原論 / 說文解字 / 韋政通, 中國哲學辭典 / 論語 / 孟子 / 老子 / 莊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