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한] 丙寅洋擾

1866년(고종 3년, 丙寅年)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江華島)를 침범한 사건. 프랑스 함대의 군사적 위협은 이미 1846년(헌종 12년)에 시작되었는데,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 해군 소령은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기해(己亥)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회답을 받기 위해 그 이듬해에 다시 올 것을 통고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프랑스 군함은 이듬해에 다시 서해안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세실이 아니고 라피에르(Lapierre, 拉別耳) 해군대령이 군함 2척을 거느리고 왔었다. 그러나 강풍으로 군함 2척이 모두 파선됨으로써, 영선(英船)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56년에는 군함 비르지니(Virginie)호가 조선 해안을 약 1개월간 정찰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1860년에 영 · 불군(英佛軍)이 중국 북경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지자, 불국 군함에 대한 공포가 커졌고 러시아의 남침 위협까지 겹치게 되니 조정은 천주교 측의 협력을 얻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鍾三) 등 지도급 교회 인물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방아책(防俄策)으로 한불동맹(韓佛同盟)의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이 때 북경에서 양인(洋人)을 학살한 사건이 전해져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천주교와의 교섭을 비난하고 나아가서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의 체포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병인(1866년) 박해가 시작되어,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남종삼 등 저명한 교회지도자들이 모두 잡히어 처형되는 참사가 계속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들은 6월 중순(음)에 회합하고, 중국으로 박해소식을 알려, 구원을 청하기 위해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파견키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리델 신부는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선편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7월 7일(음) 중국 치푸(芝罘)에 도착하는 즉시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을 만나, 조선에서의 박해소식을 알리는 한편, 살아남은 두 신부를 구출하고, 또한 가능한 한 조선 교회를 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로즈 제독은 보복을 위해 곧 출동하려 했으나, 때마침 인도차이나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키 위해 조선으로의 출동이 자연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치푸에서 돌아온 로즈 제독은 우선 정찰을 목적으로 1866왼 9월 18일(음) 기함(旗艦) 프리모게(Primauguet), 통보함(通報艦) 데룰레드(Deroulede), 포함(砲艦) 타르디터프(Tardif) 호를 거느리고 치푸항을 출항하였다. 22일(음) 물치도(勿淄島, 오늘의 芍藥島)에 정박한 다음 군함 두 척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26일(음)에는 양화진(楊花津)을 거쳐서 서강(西江)에까지 다다랐다.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쳐들어올 것을 청국으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으나, 크게 믿지 않았으므로 해안경비를 별로 강화하지 않았던 터이라 군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서강에서 만 하루를 정박한 프랑스 군함은 그 이튿날 하강하여 물치도에서 통보함과 합류하여 10월 1일(음) 물치도를 떠나 치푸로 되돌아갔다.

10월 6일(음) 로즈 제독은 조선 해안에 대한 정찰이 성공적이었음을 본국에 알리고, 그의 병력만으로도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에서의 박해를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므로 곧 휘하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러 가겠다고 보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로즈 제독은 10월 11일(음) 모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발, 물치도에 정박하고서, 14일(음)에는 강화도 갑곶(甲串)에 육전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16일(음)에는 강화부(江華府)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프랑스 함대의 재침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이경하(李景夏), 이기조(李基祖), 이용희(李容熙), 이원희(李元熙), 신관호(申觀浩) 등 무장(武將)들로 하여금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부평(富平), 제물포(濟物浦) 등의 요소와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통진에 입성한 이용희는 19일(음) 로즈 제독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조선 침공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곧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로즈제독은 동일자로 회답하면서 선교사 살해를 문책하는 한편, 그 주모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사를 보내어 조약의 초안을 작성케 할 것을 요구하였다.

26일(음) 문수산성을 수비하던 한성근(韓聖根)은 마침 정찰 중이던 70명 가량이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가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군은 5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전등사(傳燈寺)에 집결 중이라는 정보에 접한 로즈 제독은 약 150명의 정찰대를 그 곳으로 파견하였는데, 정족산성을 수비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와 잠복해 있던 500여명의 군사가 이를 기습하여, 프랑스군은 30명의 부상자를 내고 간신히 갑곶으로 도주하였다. 이렇듯 연이은 패전과 곧 닥쳐올 추위로 염하(鹽河)가 얼어붙어 보급이 끊길 우려가 있었으므로 로즈 제독은 마침내 철군을 결심하게 되어 21일(음) 완전히 조선 해안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병인양요는 끝을 맺었다. 프랑스는 위신은 추락되었으나, 그들은 재차의 침략을 도모하지 못하고, 통상의 요구 등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향으로 조선과의 접촉 협상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의 국제적 지위와 청국과의 관계에서 조선의 독자성이 뚜렷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병인양요로 인해 종래의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까지 침범하였다 하여 그 곳을 새로운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그 부근 절두산에서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李光麟, 韓國史講座 5卷, 一潮閣, 1981 / 崔奭祐, 丙寅洋擾小考, 歷史學報 30, 歷史學會,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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