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대(二大) 가톨릭 식민지 국가들에게 부여되었던 포교상의 특권. 근세에 들어와 신대륙(新大陸)이 발견되면서부터, 로마 교황청은 해외의 포교사업을 대부분 포르투갈 및 스페인의 왕실(王室)에 위임하였다. 이 두 나라는 그 당시 강대국으로서 이 임무 수행의 권력과 수단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포교 열의도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책과 장려책으로 두 나라는 통상 및 토지 획득의 독점권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 직위에 대한 보호권까지도 획득하였는데, 1493년 5월 3일 및 4일의 대교서(大敎書)에 의해서 보호권은 해외의 전지역에서 항구적인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교회법상 일종의 특권이었는데, 그러나 교구의 수립이나 선교사의 파견 등 실천을 통한 포교를 전제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스페인은 필리핀(Philippines) 군도와 아메리카(America) 등지에서 이 의무를 다했으나, 포르투갈은 1600년 이후 국력의 쇠퇴로 아시아 등지에서의 의무수행이 불가능해지고, 한편 1622년 로마 교황청에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설립됨으로써 포교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로마는 포르투갈의 기존권리를 그대로 용인하면서, 다만 대목(代牧)이나 선교사를 파견하여 포르투갈의 포교사업을 도우려는데 그쳐, 1576년 마카오에 이어 1690년에 새로이 중국 북경과 남경에 보호권 교구가 설립되기까지 그 특권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로마 교황의 대교서를 내세워,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견된 대목과 대립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포교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특히 서남(西南) 아시아 및 중국에서 이 싸움은 더욱 심했는데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와의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1792년 조선 교회가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인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위임됨으로써 조선 교회는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보호권만을 고집하고 선교사의 파견 등 보호권에 따른 의무는 이행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조선 교회 발전에 지장이 되었다.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 이후에도 북경교구는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계속 고집하였고 그래서 초대 조선대목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를 위시하여 조선에 입국하려는 프랑스의 성직자들이 만주 등에서 심한 천대를 받아 조선 입국의 어려움을 더욱 겪는 고통까지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보호권을 포르투갈 영토에 한정케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1838년 고아(Goa)의 이교를 초래케 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28년 및 1929년의 협정에 의거하여 비로소 항구적인 질서가 확립되어 오늘날, 고아 등 몇몇 포르투갈 식민지에 한해 아직도 보호권 교구가 존속하고 있지만 1950년 7월 18일 로마 교황청과의 협약에 의거, 포르투갈은 포교상 포교권하의 여러 교구에 대한 임명권을 포기하였다.
[참고문헌] A. Da Silva Rego, Le Petronage Portugais de l’Orient : Apercu historique, Lisbon 1957 / J. Godinho, The Padroado of Portugal in the Orient. 1454-1860, Bombay 1924 / 崔奭祐, 朝鮮敎區 設定의 敎會史的 意味, 敎會史硏究, 제4집, 韓國敎會史硏究所, 19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