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이래 수도 대교구(首都大敎區). 북경은 이미 7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us), 즉 경교(景敎)와 접촉을 가졌었다. 북경의 최초의 선교사는 교황사절을 겸한 프란치스코회원 요한 몬테 코르비노(Monte Corvino)였는데, 그는 1294년 당시 캄발레크(Kambalek)로 불리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북경은 1307년 두 개의 속교구(屬敎區)를 가진 대교구로 설정되었고, 이듬해 요한 자신이 대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선교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 북경에 복음이 다시 전래된 것은 마테오 리치(M. Ricci, 李瑪竇)에 의해서였다. 그는 1601년에 북경에 도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즉 1610년까지 북경에 체류하였다. 1650년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의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1690년 북경이 남경과 함께 포르투갈 보초권 교구로 설정되면서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 뒤 또 세 개의 성당이 북경에 세워졌다. 박해 후 북경주교좌는 공석이 되었고, 그래서 남경교구에 의해 관할되었다(1747-1778년). 1835년 북경교구의 관할은 라자리스트로 넘어갔다. 1924년 미국의 베네딕토회원에 의해 북경에 보인대학(輔仁大學)이 세워졌다. 1946년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북경은 수도관구 대교구로 승격되는 동시에 전경화(田耕華) 교구장이 동양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50년 북경교구의 교세는 본당 75개, 교구사제 80명, 남자수도회 12개, 수사 400명, 여자수도회 8개, 수녀가 300명, 교회 운영의 남녀학교 118개교, 학생수는 5,361명, 자선단체 9개, 병실 2,00개, 그리고 북경 총인구 500만명 중 교우수는 21만 5,900명이었다.
북경교구는 한국 교회의 창설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경을 내왕한 조선사신(朝鮮使臣)들이 북경의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아울러 그들이 저술한 서학서를 갖고 들어와 결국 조선에 자생적인 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북경 선교사들은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갖고 비록 실패에 그쳤을지라도 여러 번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교황청도 조선 전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1702년 조선지역은 처음으로 당시 북경교구장 프란치스코회원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della Chiesa) 주교에게 위임되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구 예수회원으로부터 영세한 이래 북당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고, 1785년 라자리스트회원이 북당을 맡게 된 이후에도 조선 교회와의 접촉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785년 북경에서 부임한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함에 따라 이후 조선 교회는 주교좌 성당인 남당(南堂)하고만 접촉을 하게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비록 1791년 선교사의 파견에는 실패하였으나 1795년에는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1792년 교황청에서 조선 교회의 관리를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한 이래 구베아 주교는 물론 그의 후임수자 사라이바(Souza Saraiva)주교도 선교사 파견 등 조선 교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1831년 조선 교회는 북경교구에서 독립, 고유한 대목구(代牧區)가 되었고 또한 조선 선교사 파리 외방전교회원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고자 1838년에는 만주지방이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만주교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참고문헌]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Paris 1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