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를 요청해 온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권리. 어떤 신성한 지역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 도망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비호권의 세속적인 형태는 특권행사 허가지구에서 행해지는 특권, 노예가 ‘자유의 도시’에 도망쳤을 때 가지는 자유, 대사관이 가지는 치외법권 등이고, 종교적인 형태란 교회에 도망쳐 온 사람에게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특권을 말한다.
비호권은 역사의 몇 단계를 거쳐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데, 대체로 국가에 의한 신법(神法)질서가 약해졌거나 파괴되었을 때 특히 강조된다. 즉 국가에 의한 사법질서가 공정하지 못하여 일반인으로부터 불신당하거나, 국가에 의한 법질서가 파괴되었을 경우에 사적 보복(私的報復)이 일반화되어 사회는 파괴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 피의 보복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불법재판에 의한 사적 형벌이 횡행한다. 이 때 위험에 빠진 사람을 은신시켜 그러한 사적 보복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지역을 설정, 이들을 보호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된 이후부터 교회는 비호권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도망자를 위해 사제가 중재에 나설 때까지 체포를 연기하는 정도의 비호권만이 교회에 주어졌다. 중세에 와서 비호권은 강화되었고, 자세한 규정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비호권은 중재행위와는 별도로 신성한 장소에서 폭력을 동원한 체포를 막을 수 있는 권한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비호권의 보호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주로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하에서 구조적 폭력을 당해야 했던 농민, 제조업자, 상인들이었다.
시민사회가 확대된 중세 이후 비호권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동시에 국가권력이 교회의 비호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일어났다. 교황 그레고리오 14세 이후(1591년) 비호권은 교회법전에서 원칙으로만 남아 있었다. 구교회법(1917년 공포)에 따르면 비호권이 인정되는 지역은 성당, 묘지, 수도원, 병원, 주교관, 사제관 등이다. 근대국가는 비호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므로 교회는 성당이나 축성된 묘지에 한해서, 공공의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안에서, 비호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곳에 도피해 온 사람은 긴급한 경우가 아니고는 교구직권자, 수도회 장상, 최소한 본당 주임사제의 동의없이는 폭력으로 체포해 갈 수 없다”고 구교회법은 규정하고 있으며(제1179조), 비호권의 침범을 독성(瀆聖)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325조). 왜냐하면 축성되어 성스러워진 장소는 세속권의 간섭이 자유로운 곳(제1160조)이며 이것은 신법에 기초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양심법에 대한 교회의 비호권이 여러 정권들과 마찰을 빚었다. 비호권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은 1983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피의자를 숨겨준 원주교구(原州敎區) 최기식(崔基植) 신부의 구속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이 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의한 사회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계층이 있고, 불공정한 재판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비호권은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권리이다.
[참고문헌] J.C. Cox, The Sanctuary and Sanctuary Seekers of Medieval England, London 1911 / P. Timbal Duclaux de Martin, Le Droit d’Asile, Paris 19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