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한] 社會主義 [영] socialism [독] Sozialismus

사회주의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소외되고 빈부의 차가 격심해짐에 따라 노동자의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해방을 주장하는 사상을 말한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먼저 오웬(R. Owen), 생 시몬(Saint Simon), 푸리에(J.B.J. Fourier)등에 의해서 사유재산의 철폐와 재산의 공유가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 사상들은 마르크스(K. Marx)에 의해서 공상적 사회주의로 규정되어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주의와 구별된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넓은 의미로 보면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의 모든 사회주의적 사상을 포괄하나 좁은 의미로 보면 마르크스와 레닌(V.I. Lenin)에 의해서 발전된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톨릭 교회는 어떠한 정치사항을 배격하거나 찬양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으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비오 11세가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회칙>(Divini Redemptoris, 1937)에 서 그 비인도적 성격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그 후에도 많은 문헌을 통해서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혁명의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과거에 가톨릭 교회가 추한 태도는 이론적 입장에서는 무신론 및 종교에 대한 공격이나 박해를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신학이 가톨릭 신학에 대해서 중대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신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를 중심으로 하는 문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또 세계를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이해해야 함을 요구하고, 성서 가운데 내포된 미래지향성을 재발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양자간의 이론적인 차이나 대립을 보다 엄밀하게 이해하고 규정하는 동시에, 실천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한 협력해 가려고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종교비판은 모든 사회 비판의 제일조건이다. 이 종교비판은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는 종교를 관념론의 최고 형태로서 비판하고 또 하나는 종교를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로서 비판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강자의 약자 압박의 결과이며 수단이라고 말한다. 레닌은 “우리는 종교와 투쟁하여야 한다. 이는 유물론 전반의 입문이며 따라서 마르크시즘의 초보다”라고 말하고 “신이란 자연의 힘과 계급의 속박으로 압박되어 둔해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공상의 총화이며 이런 공상은 계급투쟁의식을 약화시키고 억압시킨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비오 11세는 “현대세계에 있어 가장 무서운 위험은 사회질서를 전복하고 그리스도교 문명의 근본까지도 뒤엎어 버리려는 과격한 무신론적 사회주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회주의는 인간을 한갓 현세의 부분품으로, 물질의 노예로만 격하시키는데 반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를 옹호하고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현세의 올바른 질서를 가르친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영성의 우위, 찰나주위에 대한 영원한 생명의 우위, 상대적 존재들에 대한 절대자의 우위성이다. 사회주의자의 대다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한낱 환상적 투신에 불과하며 근거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는 복음에 비추어 인간경험을 이해하기 때문에 정반대의 견해가 옳다는 것이다.

마르크시즘의 중심에는 인간을 소외로부터 해방하여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화해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혁명의 중개의 관념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중심에는 참으로 특수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그리스도라는 중개자의 성질에서 최고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구원의 중개가 있다. 사회주의는 이성과 하느님의 계시에 반하는 오류에 가득찬 체계이며 사회의 근본을 파괴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인간 인격의 제 권리, 그 존엄, 인격 자체를 무시하는 체계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으로부터 윤리적 행위의 영적 원리인 자유를 박탈한다. 사회주의는 집단에 대한 개인 인격의 본성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에 있어서 인격은 이미 조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적 체제들은 인간의 참된 가치와 초자연적 목적을 무시한다. 사회주의의 교리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고양(高揚)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비하시키고 있다. 즉 사회주의는 인류의 마음을 침범하여 그것을 멸망시키는 치명적인 페스트와 같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양심, 인격적인 이성과 자유를 소멸시키는 일은 단연코 용납하지 않으며, 또 계급을 인간의 양심과 이성과 자유에 대치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공동체의 이성을 인정하고 계급의 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민족이나 계급보다는 더욱 깊고 훨씬 더 높은 현실이다. 이 진리는 모든 계급과 모든 이해(利害)와 증오에 대항해서 주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의 근본적 결점은 유물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 안에 있는 정신질서의 고급한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확히 해석하지도 못한다. 많은 이들의 고급경향이 감소되고 물질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하든 간에 그의 정신이 특히 계급관념을 추월할 만큼 관대하며 이해성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졍제학비판 서문에서 “인간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들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은 특정의 필연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단계에 대응한 것이다. 이들 생산관계의 총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실존적 기초가 되어 그 기초 위에 알맞게 특정된 사회적 의식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 경제생활의 생산방법은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생산과정을 제약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 세상에서 생산방법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발전이 생산방법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경제적 변화는 계급투쟁과 혁명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현존 경제체제로 인하여 혜택을 받는 계급의 저항과 이 체제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는 계급의 압력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다. 요약하면 유물사관은 상당히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였고 이에 대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충분한 설명을 하였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유물사관이 보편적 진리가 되기 위하여는 중요한 모든 역사적 사건의 근본 원인도 설명하여야 한다. 즉 다만 경제조건만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주어야 하며, 경제적 인자만이 역사적 변천에 간섭하여야 하며, 계급투쟁과 혁명이 세계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이러한 여러 명제를 설명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서 다른 요인들이 역사에 작용하여 또 역사의 흐름은 숙명에 맡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계급을 물질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사회의 계층으로 본다. 따라서 계급형성에 있어서는 심리적인 요인이나 다른 요인은 전혀 무시된다. 계급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상대적이다. 가령 마르크스가 계급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에 관한 것뿐이고 전체적인 인간에 관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가장 현저하고 가장 비인간적인 허위는 인간을 초월하여 계급을 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곳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정신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계급에 종속되는 한 가지 기능으로 환원해 버리는 일이다. 계급을 유기적 현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나 인격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더 한층 근거가 박약하다. 계급은 사회적 과정의 한 기능이며 이에 따르는 일체의 것을 다만 인격에 종속하는 부분을 이루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정치이론은 계급투쟁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고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즈와지의 투쟁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옮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자와 빈자의 관계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줄기찬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 두 계급은 처음부터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그 때에는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대하여 무산자 계급의 투쟁이 벌어진다. 착취자인 자본가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착취를 감수하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피착취자들의 힘이 증대해지면 현존사회의 균형은 무너지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즉 현존 경제체제에 의존하던 상층구조는 전복되고 새 경제체제에 부응하는 상층구조가 점차로 성립된다. 사람들은 이 혁명의 시기를 지연시키거나 단축시킬 수 있을 뿐 혁명 자체를 저지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계급투쟁을 완화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회주의의 정치이론의 허점은 폭력이라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며, 불가피한 숙명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폭력은 결코 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계급투쟁과 증오와 파괴를 인류의 진보를 위한 십자가로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혁명불가피론 또한 잘못된 이론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진리였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 자본국에서 먼저 일어났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본주의가 가장 부진했던 러시아에서 소수인에 의해서 혁명이 조직되고 추진되었다.

오늘날 개인이나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충만하고도 자유로운 생활에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요구들이 오직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사유재산제도 속에서 인간의 자기 소외의 원인을 발견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교는 소유권의 확인 속에서 또 지상의 부의, 만인에 의한 사용이라는 기본적 권리의 한계 내에서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현실적 자유의 원천을 본다.

사회주의는 그리스도 교인에 있어서 극히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인이 자기의 의무를 태만히 하고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실현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를 회심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의는 오늘날까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깊은 섭리에 의해서 악의 힘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 공산주의 (韓庸熙)

[참고문헌] 한용희, 가톨리시즘의 공사주의 비판, 숙명여대정치경제연구소 논문집, 1981 / 비오 11세,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 1937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N. Berjaev, 그리스도교와 계급투쟁, 대한기독교서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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