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립 : 1696년 프랑스의 르베빌라셰나르(Levesville-la-Chenard) 교구성당 사제인 루이 쇼베(Louis Chauvet) 신부가 창립한 자선수녀회. 1708년 샤르트르의 주교 고데(Paul Godet des Marais)가 자기 관구 내에 이 수녀회를 설치함으로써 주교관구수녀회가 되었다. 1722년에는 이 수녀회의 회원들이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Guyane francaise)에 파견됨으로써 이 수녀회의 외방전도 및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1802년에는 샤르트르의 주교요청으로 본부를 샤르트르로 옮겼다. 프랑스혁명(1789-1799년) 후 이 수녀회는 개편(改編)되고, 1861년 교황 비오 9세의 인가를 얻었다. 1949년 비오 12세에 의해 최종인가가 내렸을 무렵에는 프랑스를 위시해서 한국, 베트남, 중국, 일본, 태국, 라오스, 필리핀, 아프리카,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서인도제도, 캐나다 등에서 충실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62년에는 본부를 이 수녀회 주보인 바울로 사도가 잠든 이탈리아의 로마로 다시 옮겨 현재까지 17개국에서 4,000여명의 회원들이 열심히 복음을 생활로 증거하고 있다.
2. 한국진출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888년 7월 22일이었다. 당시 조선교구 7대 교구장 블랑(M.J.G.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5년 서울 곤당골에 영해원(孀孩院)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해 오던 중 어려움이 많아서 이 수녀회에 그 운영을 맡기기로 결심, 프랑스 본부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 마침내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해 6월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난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테르 수녀는 도중에 사이공에서 같은 수녀회의 중국인 수녀 두 사람과 합류, 1개월 반 만에 입국한 것이다. 당시 영해원에는 고아 2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네 수녀는 우선 약 40일간 우리말을 익힌 후 종현(鐘峴, 현 明洞)에 거처를 정하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영해원 운영에 헌신하였다. 한편 1890년에는 수련원(修鍊院)이 정식 발족되어, 4년 후 7명의 첫 수련자를 배출하였다. 초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는 과로가 겹쳐 이국땅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수녀회 활동이 한국 진출 후 정상궤도에 오른 것은 3대 원장 가밀 수녀 때부터였다. 가밀 원장수녀는 수녀회 공동묘지 매입, 인사카드 작성, 성당 및 보육원분원 신축, 수녀들의 지방분원 파견 등을 추진, 실행하였고, 본당 부설 소학교의 설립 등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1909년 평양(平壤), 황해도 안악(安岳)의 매화동(玫花洞), 제주도의 각 본당에 수녀들을 파견한 데 이어, 1912년에는 대구(大邱), 진남포(鎭南浦), 장연(長淵), 안성(安城), 장호원(長湖院) 등의 본당에도 파견했으며, 일반학교에도 수녀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의 혼란으로 고아들을 위해 보내오던 성영회(聖孀會, Sainte Enfance)의 원조가 두절되자 수녀원과 고아원은 극도의 가난에 허덕였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해 당시 경향잡지사 주필 겸 편집자이면서 수녀원 지도신부였던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는 강론이나 글 등의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에 호응한 각 본당신부들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150여명 고아들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정이 다시 어려워졌다. 수녀들과 고아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으며, 전쟁 말기에 가까워지자 외국인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추방과 연금사태 때문에 그들 밑에서 일하던 수녀들은 모두 본원(本院)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대에 의해 용산(龍山) 보육원 건물이 징발당해 그곳 고아들이 명동으로 합류케 되자 가중된 식량난 때문에 수녀원을 분산시키고, 수련자들은 귀가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고아원 건물마저 징발당하여 고아들은 양평(楊平), 서산(瑞山) 등지로 소개(疏開)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8.15광복 후 그간 흩어져 있던 수련자들도 다시 모여들고 징발당했던 건물도 되찾아 수녀원은 다시 질서가 잡혀갔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서울을 중심으로 일에 종사하던 수녀들은 대구, 부산, 제주도 등 사방으로 다시 흩어졌으며, 고아들도 안양(安養)과 대구에서 4년간 피난시켜야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1952년 4월부터는 일부 수녀들이 서울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수련원이 서울에 완전 복귀한 것은 1955년이었다. 베아트릭스 관구장(管區長)과 으제니 수련원장은 6.25전쟁 초기에 얼마든지 외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도 계속 남아 있다가 그해 7월 18일 공산당에게 피랍되어, 베아트릭스 관구장 수녀는 평양, 만포진(滿浦鎭)을 거쳐 ‘죽음의 행진’ 도중 11월 3일에 총살당함으로써 순교하였고, 으제니 수련원장 수녀는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휴전 후인 1953년 3월 본국 프랑스로 송환되었으나,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안악 매화동본당에 남아 학교와 본당을 지키던 김 안젤라 수녀와 김 마리안나 수녀는 1950년 10월 공산당에게 피살, 순교하였다. 이렇듯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는 1888년 이 땅에 정착한 한국 최초의 수녀회로서 한국인 수도회 창설이나 외국 수녀회의 입국을 도왔다. 1960년 4월에는 최초의 한국인 관구장이 탄생하여 모든 행정권이 한국인 수녀들에게 이관(移管)되는 등 획기적인 개혁이 있었다. 1967년 한국관구는 효과적 운영을 위해 서울과 대구의 2개 관구로 나뉘고, 중북부 지역은 서울관구가, 남부지역은 대구관구가 통할하게 되고 총회원수는 700명이 넘게 되었다. 1978년에는 수녀회 회헌(會憲)인 <생명의 책>을 교황청 인준을 받아 발간, 회원들의 삶의 지표역할을 하게 되었다.
① 교육분야 : 1979년부터 첫 서원반 전원에게 의무적으로 교리신학을 이수케 해서 일단 졸업한 후에야 전교수녀로 파견키로 했으며, 일반대학의 사회사업과, 보육과, 간호학과, 신학과 등에도 다수의 수녀들을 진출시키고 있다. 1976년에는 수녀회의 구성당을 보수하여 교육관으로 개방, 평신도들에게 3명의 전담수녀를 배치, 베델 성서 연구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밖에 젊은 여신도들을 위한 정기적인 성서연구회, 청년신도들을 위한 생활성서연구회, 근로여성들을 위한 교양강좌 등 평신도 재교육을 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② 의료분야 : 아산재단(娥山財團)이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강원도 인제(麟蹄)와 충남 보령(保寧)에 건립한 병원에 수녀들을 파견, 환자들에게 희생적으로 봉사케 하고 있다. 또한 성 바오로병원의 구매부 수익금 총액을 유치, 병원의 일반직원들의 자녀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입게 하고 있다.
③ 특수사목분야 :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기 위해 육군통합병원, 교도소, 시립병원 등에 전담 수녀를 파견, 그들의 영적인 건강을 돌보게 하고, 큰 축일 때나 영세 때 등에는 규칙상 외출이 규제되어 있는 수녀들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방문, 위안과 격려를 해주도록 하고 있다.
④ 사회복지사업분야 : 양로원 · 고아원 등 기존봉사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특히 1980년도에는 심신장애자의 해를 맞아 교구청 가톨릭사회복지사업회 ‘농아 · 맹아 선교부’에 전담 수녀를 파견, 농아 · 맹아를 위시한 지체부자유아들에 대한 봉사에 투신케 하고 있다. 또한 바자회, 숨은 애긍 등으로 가난한 무명단체 등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⑤ 본당사목분야 : 각 본당별 사목지침에 따라야 하는 제한성 때문에 수도회 고유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삭 줍는 역할을 하자는 창립정신을 살리기 위해 1978년 신천리 무허가 판자촌에 수녀들을 투입, 생활조건 향상을 위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본원의 보조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공소(公所)를 설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영적,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관구 소재지는 서울 중구 명동 2가 1의 6, 관구장은 서정렬(徐廷烈, 마리 레몽) 수녀, 대구관구 소재지는 대구시 중구 남산 3동 190의 1, 관구장은 박종묵(朴鐘默, 마리 루시) 수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