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관(主敎冠) 모양의 독특한 고딕식 건물로, 경기도 수원시 북수동(北水洞) 316번지에 우뚝 솟아 있는 이 본당은 대천사 성 미카엘을 주보로 모시고, 1891년 왕림(갓등이)본당의 공소로부터 출발하였다. 미미했던 교세는 이곳에 공소가 생기면서 차츰 활기를 얻어, 1904년 수원읍내의 유력한 신자인 차재형 · 나기원 · 최동필 · 이규재 등이 나서서 왕림본당의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와 협의하여 남수리(南水里)에 있는 황학정의 정자와 대지 800평을 사들여 공소 경당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양학교(華陽學敎)를 세워, 남녀 어린이 200명을 모아 교육사업까지 벌였다.
1906년에는 북수리에 있는 세칭 팔부자집(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을 사들여 내부를 개조, 성당으로 만들었다. 1908년 왕림본당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1년간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자, 그 곳의 알릭스 신부는 수원으로 옮겨와 주재하였다. 그 뒤 수원본당은 다시 왕림본당의 신부들이 겸임하였는데 1923년에 평양(관후리)본당에 있던 르메르(Lemerre, 李類斯) 신부가 부임한 후부터 완전히 독립된 본당으로 발전하였다. 이어 크렘프(H. Krempff, 慶元善) 신부와 박일규(朴一奎, 안드레아) 신부의 사목을 거쳐 1930년에 폴리(Desideratus Polly, 沈應榮) 신부가 부임한 뒤부터 본격적인 발전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수원에는 이 본당밖에 없었고, 전교가 잘 안 되기로 알려진 침체한 곳이었다. 폴리 신부는 부인들로 ‘명도회’를 조직, 전교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고, 돈 보스코회 등 신심단체도 구성하여 신자들의 교육과 의식개발에 힘썼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종의 민족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폴리 신부는 타고난 웅변가요, 우리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교사였다. 그러기에 33년에는 교회를 신축하는데 자신과 어머니의 사재를 털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원조를 얻어 75명의 연와조 고딕식 성당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34년 이 곳에 4년제의 ‘학술 강습회’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다가 ‘소화학원’으로 발전시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극빈자 자녀들에게 수업료 한 푼 받지 않고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그는 1948년에 천안으로 전임하여, 6.25사변 때 교회를 사수하다가 납북되었다.
그 뒤 이복영(李福永, 요셉) 신부를 거쳐, 임종구(林鍾求, 바오로) 신부 때인 1959년에 고등동(高等洞)본당이 분할될 때까지 수원본당은 수원의 유일한 본당이었다. 고등동본당이 분할되면서 수원본당은 ‘북수동본당’으로 바뀌었다. 시대의 변천과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79년 4월 5일 연건평 236평에 이르는 오늘의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그리고 폴리 신부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 성당은 신자들의 ‘열과 성’을 모아 자체의 힘만으로 건립된 수원교구 최초의 성전이다. 북수동본당은 1983년말 현재 남자 1,351명, 여자 2,155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수원의 유일한 본당이었던 이 본당에서는 이제 8개의 본당이 분할되어 나갔다. 북수동본당의 현 주임신부는 김병열(보니파시오) 신부이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신부는 1962년 9월 장금구(莊金九, 금구 요한) 신부, 1964년 7월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0년 7월 이계항(李啓恒, 베드로) 신부, 1971년 9월 정덕진(丁德鎭, 루가) 신부, 1973년 6월 정주성(鄭主成, 요셉) 신부, 1975년 4월 최경환(崔敬煥, 마티아) 신부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