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현양운동 [한] 殉敎者顯揚運動

복음을 전파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행적을 널리 보급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더욱 깊고 굳건히 하자는 운동이 1939년 경성교구에서 태동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발화되지 못하고 있다가 광복 후에야 구체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9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 대교구는 기념행사를 갖고 김 신부 유해의 본당 순회, 50일 대사 선포, 김 신부 치명성극, 가톨릭음악회 등을 개최함과 동시에 현양운동을 추진할 ‘순교자현양회’를 발족시켰다. 순교자현양회는 “만대에 빛나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자”는 구호아래 회원을 모집하는 한편, 1947년 12월 14일 제1차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순교지 조사, 순교자 유물수집, 순교비 건립 등을 추진사업으로 결정하여 1948년 ≪성경직해≫, ≪성교요리문답≫ 등의 서적과 병인박해 때 순교한 교우들의 십자가, 묵주, 성패 등을 발굴하였다. 1950년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되었던 운동은 전쟁 후 재개되었고, 1956년에는 병인박해 이후 교우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던 절두산일대 산봉우리 1,360평을 매입하였다. 1957년 9월 26일 성신중고등학교에서 명동대성당에 이르는 순교자 현양 가두행렬을 하였고, 1958년 대구교구에서도 순교자현양회 대구교구 지부를 결성하여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그 후 운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었고, 1963년 5월 새로이 운영 책임을 맡은 최석우(崔奭祐) 신부에 의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최 신부는 순교자현양운동이 전국적, 학문적으로 펼쳐져야 함을 적극 주장하고 가경자들의 시복추진, 박물관 설치, 교회 유적지 확보, 교회문화재 전시, 교회고전 출판 등을 당면과제로 제시하였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각 교구에 순교복자들을 기념하는 복자성당이 건립되고, 순교비 건립, 교회 유적지 확보, 기념관 건립 등의 사업이 입안(立案), 시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순교자현양운동은 1984년 5월 6일 순교자 103위가 시성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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