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鼎福(1712∼1791). 조선 정조(正祖) 때의 학자. 충청도 제천(堤川) 출신으로 본관은 황주(黃州). 자(字)는 백순(百順). 호(號)는 순암(順庵). 호조참판(戶曹參判) 극(極)의 아들로 태어나, 이익(李瀷)에게 사사하였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목천현감(木川縣監),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 헌직에서 선정을 베풀어 광성군에 봉해졌다. 한편 학자로서 이황(李滉)을 사숙하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일으켜 ≪열조통기≫(列朝通紀), ≪가례집해≫(家禮集解), ≪순암집≫(順庵集), ≪동사강목≫(東史綱目), ≪성호사설유편≫(星湖僿說類編) 등 많은 편저를 남기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1785년 을사년(乙巳年)의 옥사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을사년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는데, 그 저술동기는 젊은 사람들로 재기가 있는 자들이 근자에 천학(天學)이란 사학을 창도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함이라고 하여 리치(Matteo Ricci, 李瑪寶)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마이야(De Mailla, 馮秉正) 신부의 ≪성세추요≫(盛世芻-) 등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서적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4년에는 권철신(權哲身)에게 서신을 보내어 서학을 하는 무리가 공의 친구가 아니면 제자인데, 어찌 이를 보고 금하지 않고 같이 좇아가고 있는가 하고 문책하는 동시, 그로 인해 자초할 패가망신을 경고하였다. 또한 1786년에는 당시의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 서신을 보내어, 척사(斥邪)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를 꾸짖으며, 서학을 배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여, 그의 적극적인 천주교 배척의 입장을 나타냈다. (⇒) 천학고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正祖實錄 / 韓國人名大事典, 新久文化社, 19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