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시는 이 본당은 1943년 오연희(吳然喜, 마티아)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양평군 양근3리(楊根三里). 양평 땅에서 본당이 먼저 설정된 곳은 양평읍이 아니라 용문(龍門)이었다. 1908년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가 용문면 덕촌리(龍門面 德村里, 退村)에 주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평과 용문은 겉으로는 한쪽이 본당이요, 다른 쪽은 공소이긴 했으나 한 본당이나 다름없었는데도 양쪽 교우들은 서로 본당신부를 자기 지역에 주재시키고자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1943년에 이르러 본당이던 용문은 양평공소가 되고, 용문본당의 공소이던 양평은 본당이 되었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의 양평 초대 본당신부는 오연희 신부였는데, 처음에 용문에 부임하였던 오신부가 전임 신부들의 뜻을 따라 양평읍에 주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신부 재임시에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하고, 1947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 1948년에는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여 2년간 사목하였다. 1949년 9월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서 6.25동란이 나고, 본당은 일시 부산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으로 말미암아 양평 성당은 파괴되고, 주임인 이계중 신부는 군종 신부로 입대하니, 얼마동안 공백기를 겪기도 하였다.
1952년 12월 김정진(金正鎭,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활기를 되찾은 이 본당은 용문까지 관할하면서 1954년 4월에는 양평 유치원도 설립하였다. 또 이 해 11월 18일에는 1,000평의 대지에 85평의 성당도 낙성하였다. 또 1956년 12월에는 용문성당도 짓게 되고, 그 해의 신자총수는 용문공소를 합하여 1,600명에 달하였다.
1957년 3월 김정진 신부는 가톨릭대학 조교수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평양교구 출신인 강현홍(姜賢洪,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그의 재임 중인 1958년에 용문공소가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어 독립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그 관할로 편입되었다. 현재 본당주임은 최충렬(崔忠烈, 마태오) 신부이며, 성가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나와 있고, 신자총수 1,547명에 6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