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는 것으로서 중국의 고전, 즉 육경(六經)[時, 書, 易, 禮, 樂, 春秋]의 가르침이 비록 다르긴 하나 예를 근본으로 삼았다. 예는 정치, 법률, 종교, 윤리가 미분화된 채 있었던 행위규범(Nomos)이었다. 우선 ‘예’자의 뜻을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해 살펴보면, 밟는다는 ‘이’(履)로 풀이하였는데 그것은 실천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실천함으로써 신(神)을 섬기고 복(福)을 오게 한다는 말이다.
글자의 구성은 ‘示’와 ‘豊’으로 이루어졌다. 이 ‘示’자는 다시 ㅗ과 川으로 되었는데 ㅗ자는 고문(古文)에서 상(上)자와 같으며 하느님, 상제(上帝)를 뜻하고 川은 세 가지를 내려 준다는 뜻으로 해, 달, 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示’자는 하느님이 어떤 꼴(象)을 내려주어 길흉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해, 달, 별은 하늘에 있는 무늬[天文]로서, 인간은 하늘이 보여준 글자[天文]를 깊이 꿰뚫어 봄[觀]으로써 때[時]의 옮아감[變]을 살필 수 있다. 그 다음 ‘豊’자의 뜻을 살펴보면 ‘豊’은 ‘예’를 행하는 그릇으로서 ‘豆’는 그릇 모양을 본뜬 것[象形]이라 하였다. ‘豆’는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이요, ‘豆’위의 曲자는 조개[蛤리]로 만든 술잔, 또는 옥(玉)을 담는 것이다. 그러니까 ‘豊’자는 제기[豆]뒤에 담아 바치는 물건[祭物]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示’자와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禮’자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示] 은혜(해, 달, 별)에 보답하기 위하여 인간이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어 복을 비는 종교적 의식을 상징한 것이다. ‘예’에 따라 거행되는 종교의 예는 원래 신성한 것이었으므로 일정한 절차를 요하는 것이었고 함부로 접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자(漢字)의 離(li)(떨어지다, 간격을 두다)는 원래 豊(li)자와 통용되는 음이었고 그것은 금기(taboo), 격리된 것을 뜻하였다. 즉 어떤 신비한 힘(mana)을 가진 것에 대한 금기라는 뜻이다. 어떤 신비한 힘을 가진 것에 대하여는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범하면 화(禍)를 입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목숨까지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제정(祭政)일치 시대의 종교적 의례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숭배의 대상은 주로 자연(自然)과 조상(祖上)이었으며, 거기에 신비한 힘이 깃들이게 되면, 자연은 천신(天神)이 되고 조상은 인귀(人鬼)가 된다.
중국 고대인들은 처음엔 다신론적 정령(精靈) 사상을 믿었으나, 차츰 천신, 지지(地祗), 인귀로 정리되었다. 제정시대의 예는 크게 하느님에게 제사[祭天] 지내는 교사(郊社)의 예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祀告] 종묘(宗廟)의 예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의 원초적 의미는 바로 ‘천’(天)에 대한 공경과 신앙의 정감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제례(祭禮)가 제정의 구실을 겸했기 때문에 통치자인 천자(天子)가 행하는 ‘예’였다. 천자는 천의 명을 받은 그 대행자로서 천과 백성들간의 매개자였다고 할 수 있다. 천자를 중심으로 한 집례자(執禮者)들이 바로 유자(儒者)의 선구자였다. 천자가 거행하는 종교적 의례는 단순히 천에 대한 제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천의 권위로써 일반 백성들의 정치적 윤리적 생활을 지도하고 규제하는 데 기여하였다. 천자의 예는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국가의 전례(典禮)로 발전했고, 이것이 정치의 근본[政之本]으로서의 예가 된 것이다.
이 예는 바로 주대(周代) 봉건제도에서 볼 수 있는 신분(身分)의 상하, 반작(班爵)의 반별, 장유(長幼)의 차등인데 이것은 조근(朝覲)의 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 질서의 뒷받침이 되었던 ‘예’는 형식만 남게 되었다. 공자는 형식만 남아 있는 ‘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인(仁)과 의(義)였다. 또 과거의 예는 치자(治者) 중심으로 행하여져서 서민에게까지는 내려가지 않았으며[禮不下庶人], 형벌은 귀족들에게 까지 올라가지 않았다[刑不上大夫]. 그런데 공자는 서민도 ‘예’로써 인도하고 다스리면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또 바로잡는다[齊主以禮, 有恥且格]고 하여 예교(禮敎)를 주장하였고, ‘인’을 실천하는 것이란 자기 욕심을 누르고 ‘예’에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 생각하였다. 여기서 ‘예’는 정치의 근본으로서가 아니라, 윤리도덕의 근본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공자 이후 복례(復禮)의 측면을 발전시킨 인물이 순자(荀子, 기원전 298∼235)있으며, 그의 예론(禮論)은 뒷날 거의 모든 예학(禮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예에 관한 문헌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서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가 있다. 그 뒤 각 왕조에서 각기 특별한 의례가 제정되었는가 하면, 또한 종법제도를 합리화한 가례(家禮) 등도 편찬되었다.
예의 내용은 보통 길(吉), 흉(凶), 군(軍), 빈(賓), 가(嘉)의 오례(五禮)로 나누어지며, ① 길례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나라 제사의 모든 예절을 지칭하며, ② 흉례는 죽은 사람의 장송(葬送) 등의 예식을, ③ 군례는 군대에 관련한 예절을, ④ 빈례는 빈객(賓客)에 관한 예절, ⑤ 가례는 관례(冠禮)나 혼례 따위의 경사스러운 예식을 가리켰다. ≪주례≫의 내용에서처럼, 국가의 관제(官制) · 법제(法制)를 적은 경우도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사회의 기능분화에 따라서 법이나 율령(律令), 직관(職官)으로서 분립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예’는 한국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475)는 우리나라에서 오례 중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으로 편찬, 완성한 것이며, 고려말에 한국에 수입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인데,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됨에 따라, 위에 말한 예제의 준행이 권장되고 차차 보편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예학파(禮學派)의 대두, 가족제도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경직화된 ‘예’의 준행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새로운 문화의 도입에 역기능을 한 면도 있었다. (鄭仁在)
[참고문헌] 說文解字 / 加藤長留, 中國思想史 / 李乙浩, 禮槪念, 茶山學의 理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