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라] Joannes Paulus

Joannes Paulus 1세(1912∼1978). 교황(재위 : 1978. 8. 26∼1978. 9. 28).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벨루노(Belluno) 교구 포르노 디 카날레(Forno di Canale)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트레(Feltre) 소신학교, 벨루노대신학교를 거쳐 1935년 서품.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1937년), 아제르도(Agerdo)에서 사제생활, 벨루노 신학교에서 교의신학, 교회법, 교회 예술사를 강의(1937∼1947), 부학장을 역임한 뒤 교구의 사무차장을 거쳐 주교대리를 지냈다.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주교서품(1958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개혁정신에 대한 그의 의견은 자신의 교구에 보낸 교서 <공의회에 대하여>(Note on the Council, 1969)에 명시되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69년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1973년엔 추기경회의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바오로 6세의 서거 후 열린 교황선거에서 이례적으로 첫 날의 2차 투표에서 제263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의 인간미와 소박함은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시스틴 경당에서 라틴어로 발표한 첫 메시지를 통해 “교회의 사명인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전 교황인 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유지를 받든다는 의미에서 ‘요한 바오로 1세’로 교황명을 정하고 그들의 온건한 개혁정책을 촉진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겸손을 평생 자신의 표어로 살아온 그는 현대교회 사상 처음으로 교황을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상징화하였던 화려한 대관식(戴冠式) 대신에 간단한 즉위미사를 통해 ‘팔리움’(pallium)을 받았다. 그의 사목지침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산을 계속 실행에 옮기고, 사제와 신자들의 생활 속에 있는 교회규율의 완전성을 보존하며, 교회의 첫째가는 의무가 복음 전파임을 환기시켰고, 교리를 손상시킴이 없이,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교회일치의 신념을 지속시킴은 물론, 인내를 가지고 굳건히 사목 활동을 위한 바오로 6세의 건설적인 대화를 지속시키며, 세계평화를 위한 모든 훌륭하고 가치 있는 제안들을 지지한다는 것 등이 주요 골자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낙태 및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온 배경을 가진 새 교황은 즉위 26일만에 침대 위에서 평화롭게 영면, 그의 갑작스런 서거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신체장애자를 위한 원호기금 마련에 교구 내 각 성당의 금은제 성구류(聖具類) 매각을 허용했던 그는 “교회의 참된 보배는 가난한 사람들이다”(1976년 사순절 교서에서)라는 믿음을 가진 ‘청빈의 사도’로서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장 적절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Joannes Paulus 2세(1920∼2005). 교황(재위 : 1978. 10. 16∼2005. 4. 2).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의 바도비체(Wadowice) 출신으로 원명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네덜란드 출신 교황 하드리아노(Hadrianus) 6세 이후 최초의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다. 일찍부터 가난과 노동을 겪으며 독학, 1938년 야젤로니아(Jagiellonian)대학 철학과에 입학, 시와 연극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후에 ‘안드레아 예비옌’이란 필명으로 다수의 시를 발표하였다. 나치 점령 때 채석장과 화학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조건 개선 및 지하 연극단체에서 배우로 활약하였다.

1942년 성직에 뜻을 두고 나치 탄압 속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크라코프 신학교에 입학, 전쟁 뒤인 1946년 서품, 2년 동안 로마의 안젤리쿰대학(현재 성 토마스 아퀴나스대학)에 유학, 윤리신학을 연구하였으며 귀국 후 야젤로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구 사목 후 곧 크라코프(Krakow)에서 대학생 사목을 담당, 1953년부터는 크라코프대학에서, 1954년에는 루블린(Lublin)의 가톨릭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강의하였다. 학술잡지, 특히 윤리신학 분야에서 300여 종의 논문을 발표, 학계에 알려졌으며, 셸러(Max Scheler, 1874~1924)의 현상학 체계에 관심을 가졌다. 1958년 주교로 서품, 1964년 크라코프의 대주교로,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는 폴란드 교회를 대변하는 역할을 탁월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기초에 기여하였다.

그 밖에 추기경 경력 11년 동안 세계 대표주교회의의 평의원(임기 3년)을 1971년 이래 연속 3번 역임하였는가 하면 교황청에서는 동방교회, 성직자, 성사전례, 교육 등 4개 성성(聖省)에 관계하였다. 한 때 평신도위원회 고문을 역임, 1976년 필라델피아 국제성체대회에서 폴란드 대표단장으로 참석, 미국에 알려졌다.

폴란드 교회의 최고권자인 비스진스키(Stefan Wyszinski) 추기경과 함께 폴란드 교회를 대표하며 ‘노동자의 추기경’으로도 불려졌고, 1978년 10월 16일 제 254대 교황으로 선출되어 사상 초유의 공산국가 출신의 교황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세목이 집중되었다. 전임 교황 명에 따라 ‘요한 바오로 2세’로 명명, 10월 22일 즉위. 그는 교도방침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신중히 따르고 실천할 것을 약속, 신자들에게는 기본교리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또한 가톨릭 교회는 정치에 참여할 의도는 없지만 “이 순간 경제 · 사회 · 정치 · 종교적인 모든 불의와 차별로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낼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참고문헌] 崔奭祐 編著, 敎皇 그는 누구인가,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참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는 2005년 4월 2일 바티칸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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