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세례명 파치피코. 1831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조선 교우들의 신부 파견 요청을 접수하여 브뤼기에르(Burguiere, 蘇) 주교의 조선 파견을 지지, 그의 자원을 허락키로 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중국인 신학교에서 7년간 수업하여 사제서품을 받은 유방제 신부는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조선에 가기를 지원하였다. 이에 포교성성은 이를 수락하고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먼저 길을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싱가포르를 떠났을 때에는 이미 중국에 들어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1834년 1월 3일 정하상(丁夏祥) 등의 안내로 변문(邊門)을 통과하여 조선 입국에 성공한 그는 16일에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 입구하자 주교의 입국을 준비할 사명을 지니고 주교의 입국을 방해 내지는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주교는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제대로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 신부의 사주에 의한 반감에 부딪쳐, 조선 입국의 길을 찾지 못하고 중국대륙을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방황하다가, 1835년 10월 조선입국 직전에 선종하였다.
이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조선교구 관할에 필요한 전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곧 달려가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1835년 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곧 유방제 신부가 묶고 있는 처소로 들어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유 신부가 그 동안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사실과, 선교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등 비위사실로 인하여, 조선 교우들의 신앙심을 잃고 있음을 알고는 이를 충고하였으나 끝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부주교의 권한으로 그에게 모든 성무집행을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단념한 유방제 신부는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 고향인 중국 산서성(山西省)으로 돌아가게 되자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가게 된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齊) 등 세 명의 어린 신학생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이후 만주 · 몽고 ·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8개월 만에 그들을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케 하였다. 고향에 돌아간 유방제 신부는 그때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신부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입국하여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것은 조선교구의 관할권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가자, 양자간에 알력이 생겨, 북경교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출신 성직자들이 뒤에서 이를 조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