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검(1756∼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전주(全州) 출신. 윤지충(尹持忠)의 이종사촌, 윤지충에게서 교리서적을 빌어 보고는 이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권일신(權日身)을 찾아가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고향에서 전교에 온 정열을 쏟아 호남지방 교회 창설의 초석이 되었으므로 ‘호남의 사도’(使徒)로 불리게 되었다.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행위(瀆聖行爲)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주교에게 문의편지를 내게 한 것도 그였다. 이렇게 해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여 지방에 내려왔을 때에는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여 함께 전교에 힘썼다.
따라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지방에서는 그가 제일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형조의 심문에서,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하였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의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전주감영으로 다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 참수되었는데 그의 나이 46세였다. 달레(Dallet)는 그를 순교보다는 배교 쪽으로 보고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부인 신희(申喜), 큰아들 유중철(柳重哲),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둘째 아들 유문석(柳文碩), 동생 유관검(柳觀儉) 등이 처형되었다.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