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남침에 의해 발생된 전쟁으로 한국 교회에 큰 피해를 끼쳐 준 사건.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국내여건의 변동에 따라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한국을 38도선을 경계로 남 · 북으로 양분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의 명목으로 진주하고,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북한에는 김일성을 중심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군사부의 세력을 등에 업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를 갖추어 그들의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 혁명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반면에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아직 정돈되어 있지 않고,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좌 · 우익의 갈등이 격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외교정책도 일관성이 없어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동요가 보이자 이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북한 공산집단은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남한은 북한의 침략에 대한 하등의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걸친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 가톨릭 교회가 겪은 피해는 더욱 컸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에 가톨릭 신자들은 곳곳에서 박해와 수난을 당하여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사실상 부인하며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공산정권은 6월 24일 남침 하루 전날 야음을 기하여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대거 체포 구금하게 되었으니, 평양교구의 조인국(趙仁國) 신부, 이경호(李京鎬) 신부, 강영걸(康永杰) 신부, 김교명(金敎明) 신부, 김동철(金東哲) 신부 등 다섯 신부를 비롯하여 함흥, 덕원교구의 김봉식(金鳳植) 신부, 이재철(李載哲) 신부, 황해도 은율본당의 윤의병(尹義炳) 신부, 장연본당의 신윤철(申允鐵) 신부, 겸이포본당의 유재옥(劉載玉) 신부 등이 잡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정권은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거의 대부분 체포 감금한 후 남한에 있던 신부들을 죽이거나 구금하기 시작하였다. 즉 6월 27일에는 강원도 소양본당에서 아일랜드인 콜리어(Collier) 신부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7월 2일에는 서울 영등포본당의 이현종(李顯鍾) 신부를 총살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성직자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고 성당을 징발하였다. 또한 7월 2일부터는 춘천교구에서 캐나반(Canavan, 孫) 신부를 비롯하여 퀸란(Quinlan, 具) 교구장, 홍천본당 크로스비(Crosbie, 趙) 신부가 체포되었고, 강원도 묵호본당의 레일러(Reiller) 신부와 삼척의 마긴(Maginn) 신부는 7월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7월 11일을 전후해서 서울 주재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를 비롯하여 사절비서 부드(Booth, 夫) 신부, 인천 바오로 수녀원에 공베르(A. Gombert, 孔) 신부가 각각 체포되었고, 8월부터는 목포에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신부를 비롯하여 2명의 아일랜드인 신부가 잡히고, 또 대전교구에서는 프랑스인 신부 9명과 한국인 신부 1명이 체포당하였다. 또한 부여의 몰리마르(Molimard, 牟) 신부는 8월 20일에 체포되었다.
한편 북한지역인 황해도에 이때까지 남아 있었던 몇몇 신부들도 6.25 이후 이순성(李順成) 신부, 양덕환(梁德煥) 신부, 이여구(李汝球) 신부, 서기창(徐起昌) 신부, 김경문(金景文) 신부, 전덕표(全德杓) 신부 등이 체포됨으로써, 남북한을 통해 북한군에게 체포 혹은 학살당한 신부, 수녀, 신학생의 수는 15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 이를 교구 · 신분 · 국가별로 보면 위의 표(表1, 2)와 같다.
북한 공산군에게 잡힌 외국인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서울 소공동에 있는 삼화빌딩에 수용되어 문초를 받다가 7월 19일부터는 평양으로 끌려가서 다시 신문을 받은 후, 평양시 밖에 있던 유치원에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그 곳에서 서울로부터 연행되어 온 프랑스 영사와 영국영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 100명을 헤아리는 외국인 성직자들은 다시 9월 6일에 만포진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만포진으로 끌려간 성직자들 가운데 굶주림과 추위로 죽거나 학살당한 이가 11명이 나오게 되었다. 서울 바오로 수녀원의 원장이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1950년 11월 3일 죽음의 행진 길에서 총살당하고, 같은 수녀원의 비에모(Paul Villemot, 禹) 지도신부는 11월 11일에 81세 옥사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던 갈멜 수녀원의 공베르 지도신부는 다음날에 76세로 옥사하였다. 공 신부의 동생으로서 인천 바오로 수녀원의 공베르(Julien Gombert, 孔) 지도신부는 그 다음날에 74세를 일기로 옥사하고, 교황사절 방 주교는 11월 25일에 옥사하였다. 이 밖에 프랑스 신부 2명, 독일 신부 1명, 아일랜드인 신부 1명, 벨기에 수녀 2명이 1951년을 전후하여 옥사하였다.
6.25전쟁은 3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상태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 휴전협정은 평화조약이 아닌 만큼 휴전협정 이후에도 종국적인 평화가 회복되지 못한 채 남 · 북한의 대치상태는 그대로 계속되었고, 열전상태에서 냉전상태로 전환되었을 뿐이었다. 6.25전쟁은 한국군 외에 유엔에 가입된 16개국이 직접 전쟁에 참전하고, 24개국이 물자 원조를 하여 3년간에 걸쳐 싸운 전쟁이었으며, 세계 전쟁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군과 유엔군은 90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176만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러한 인명손실 이외에도 도시와 교량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폐허화하였다. 전쟁의 참화를 입은 이후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고 전화의 극복을 위한 교회의 활동에 감명받은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1953년도 남한의 총인구는 2,144만명이었고, 그 중 16만 6,471명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그 후 8년 동안에 신도들이 해마다 늘어, 1954년도에는 18만 9,000여명, 1955년도에는 21만 5,000여명, 1956년도에는 24만 2,000여명, 1957년도에는 28만 5,000여명, 1958년도에는 35만 4,0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공산군의 학살행위로 말미암아 근 50명의 한국인 신부를 잃게 된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제주도 또는 부산의 영도로 옮기면서 성직자의 양성에 노력한 결과 1950년 10월 20일부터 1953년 8월 22일까지 이르는 사이에도 53명의 새 사제를 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군에게 연행되었던 외국인 성직자들도 휴전협정이 조인된 때를 전후하여 석방되어 각각 본국에 송환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즉 1953년 4월에는 성신대학(가톨릭대학)의 교수였던 코요스(Coyos, 具) 신부 등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나왔고, 그해 8월 24일에는 연길교구의 성 올리베타노 수녀원의 원장이던 페슬러 수녀가 스위스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춘천 교구장이던 퀸란 주교도 에이레로 송환되었다가 그해 10월 5일에 한국주재 교황사절대리로 임명되어 다음해 4월 23일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덕원 교구의 히머(C. Hiemer, 林) 신부를 비롯한 12명의 신부와 12명의 수사와 18명의 수녀는 5년간에 걸친 감금생활을 하는 사이에 17명의 동료를 북한 땅에 묻고 1954년 1월 22일에 서독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편 본국으로 돌아갔던 독일 성직자들도 1953년 7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북도 왜관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인근 6개 군에서 전교하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비테를리(Timotheus Bitterli, 李) 신부가 덕원 · 함흥 · 연길 교구장으로 임명되게 되었다.
전쟁 중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에서는 많은 구호물자를 보내 전재민을 구호해 주었고, 이러한 외국기관의 원조와 한국인 신도들의 노력으로 파괴된 여러 곳의 성당이 재건되었으며, 많은 성당을 새로 세우게 되었다. 또한 전재민을 위한 구호사업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교구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미국 메리놀회에서는 부산에 자선병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하여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1954년 10월 25일 보건부장관은 6.25전쟁 이래 43만명의 부상자를 고쳐 준 메리놀 자선병원장 머쉬 수녀에게 감사장을 주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한국민족 전체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이 전쟁기간 중 교회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전화(戰禍)의 극복과 전재민의 구호를 위해 모든 힘을 다 하였다. 그 결과 6.25전쟁은 한국민에게 천주교의 존재와 그 봉사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휴전회담 이후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柳洪烈著, 增補한국천주교회사, 하권, 가톨릭출판사, 1975 / 金昌文 · 鄭宰善 共編, 韓國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코리아社, 19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