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 [한] 情慾 [라] concupiscentia [영] concupiscence

하느님을 지향하지 않고 악에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 정욕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구세사에서 연역된다. 구약성서 안에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대목에서 인간을 악에로 이끄는 힘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적대하도록 충동하는(창세 8:21, 예레 17:9) 내재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아직은 죄로부터 연역되지 않았고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일부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통일체로 보는 히브리적 개념에 따라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서 역시 영과 육의 욕망을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의 욕망’이란 바울로의 표현이 헬레니즘적 이원주의를 연상시키나 그 뜻은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거스리는 전인의 자기주장이다. 이처럼 악한 욕망이 인간의 감각적 삶에서 표현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갈라 5:19-, 에페 2:3) 육체와 감각을 비관적으로 보는 안목은 지양되어 있다. 정욕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힘이라고 할 때 정욕의 자연스러움과 그것이 인간 구원에 기여하는 순기능을 간과해 버리기 쉽다. 정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존재하며(로마 7:5, 8:8, 갈라 5:24), 구세사에서 아담의 죄와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정욕과 인간 본성과의 관계 및 정욕의 구체적 발생이 문제된다.

인간을 통일된 단일체로 보던 성서적 관점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이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부들의 사상 가운데에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측면을 소극적으로 보는 태도로 채색되었다. 원죄이전 정욕이 없는 인간의 상태가 과성(過性)은혜의 상태인 한 정욕은 인간 존재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고 문제 삼는 교부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펠라지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정욕을 인간 본성의 결핍으로 보았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정욕이 ‘죄에서 연유하고 죄로 유인하는 것’(Denz. 792)이라 하였는데 이는 구세사적 관점에서 선언한 것이며 정욕의 구체적 발생과 실제적 강도가 죄에 의존한다고 본 것이다. 정욕은 초자연적인 것에 반대하는 인간의 자기주장으로 표현될 때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럴 때 구원 경륜 안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정욕은 죄 중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초자연적 목적과 숙명을 거스리는 반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초자연적 자기완성을 저지하는 소극적 실존이며 이 소극성은 감각 분야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모든 분야에 미친다. 그러므로 정욕은 파괴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을 절대자의 지위로 높이기도 하고 타락과 자기 파괴적인 의지, 여러 형태의 중독증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욕의 파괴적 성향을 과장해서는 아니 된다. 정욕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며(로마 7:8, Denz. 792) 정욕의 원인이 되는 죄는 인간의 본성을 본질적으로 부패시키지 않는다. 정욕이 지니는 소극성은 반대세력에 의하여 저지되기 일쑤이다. 그 반대세력에는 절대자인 하느님을 그리는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동경,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인간 의지의 영원한 지향성 등이 있다. 이러한 제동이 정욕의 한계를 규정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정욕은 하나의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하는 움직임이며 선을 지향하는 의지의 경향과 은총으로 인한 이 경향의 실현에 의하여 부단히 좌절되고 완화되는 움직임이다.

정욕은 또한 인간의 투쟁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정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통을 따르게 하고 구속에 참여하게 한다. 구세사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은총의 도움을 받아 정욕을 윤리적 질서에 맞게 점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마침내 정욕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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