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1902∼1950). 시인. 세례명 프란치스코. 아명은 池龍.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忠北 沃川郡 沃川面 下桂里)에서 부(父) 정태국(鄭泰國)과 모(母) 정미하(鄭美河)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뒤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2세 때인 1913년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하였다. 1918년 휘문고보(徽文高普)에 진학,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12월 문학지 <서광>(曙光)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하고 김화산(金華山) · 박팔량(朴八亮) · 박제경(朴濟瓊)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만들어 사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4년 휘문고보의 장학생으로 일본 교오또(京都)의 도오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 때 영세 · 입교하였다. 1926년 교오또의 유학생 문학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 <슬픈 인상화> · <파충류 동물> 등 모더니즘적인 시를 발표하면서 공적인 문학활동을 시작, 이후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의 시 전문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일어로 된 많은 시들을 발표하여 당시의 일본의 대표적 시인 가따하라(北原白秋)의 호평을 받았다.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명동본당 청년연합회 회지 <별>의 편집에 참가하여 장면(張勉) · 박준호(朴準鎬) 등과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30년〈시문학〉(詩文學)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히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이 창간됨과 동시에 편집고문이 되었고, 창간호에 <해협의 오전 2시>를 발표하고 이후 계속해서 <가톨릭청년>지에 <임종> · <별> · <갈릴레아바다> · <승리자 김 안드레아> 등 많은 종교시들을 발표하였다. 그 뒤 <조광>(朝光), <조선문단>(朝鮮文壇), <삼천리>(三千里) 등 유수한 문학지에 서구(西歐) 모더니즘적인 성향을 탈피한 독특한 동양적 모너니즘의 시들을 발표, 시인으로서 한국문단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 · 김종한(金鍾漢) · 이한직(李漢稷) · 박남수(朴南洙) 등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시켰고, 광복이 되자 휘문고보 교사를 사임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이화여대의 전신) 문과과장으로 대학 강단에 서서 라틴어와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46년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경향신문 주간(主幹)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이듬해 이화여대에 복직하는 한편 서울대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1948년 대학 강단을 떠나 녹번동의 초당에서 독서와 서예로 소일하였다. 6.25동란 중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이광수(李光洙) · 계광순(桂光淳) 등 납북 인사 33인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사당하였다.
정지용은 최초의 모더니즘 시인으로, 그리고 그것을 자기 세계 안에 융화시켜 동양적 · 목가적 모더니즘의 세계를 창출한 시인으로서 아울러 가톨리시즘을 추구했던 시인으로 한국문단사에 있어서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 時文學社, 1935), ≪백록담≫(白鹿潭, 文章社, 1941), ≪지용시선≫(芝溶詩選, 乙酉文化社, 1946) 등을 남겼고, 이외에 시론집 ≪지용문학독본≫(芝溶文學讀本, 博文出版社, 1949)과 산문집 ≪산문≫(散文, 同志社, 1949) 등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