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 [한] 丁亥迫害

1827년(丁亥年) 전라도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乙亥)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정하상(丁夏祥)을 주임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6년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6명의 천주교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 관헌들의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정해박해는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申太甫)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의 단양(丹陽)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忠州)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 이일언(李日彦) · 정태봉(鄭太奉)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 김사건(金思建) · 김언우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명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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