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1782∼1799). 문신.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본관은 평강(平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응일(膺一)의 아들. 1743년(英祖 19년) 정시문과 병과(庭試文科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이어 수찬(修撰) · 교리(校理)를 거쳐 1753년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가 되어 균역(均役), 염세(鹽稅)의 실시에 대한 민의(民意)를 파악, 왕에게 보고하였다. 1758년 도승지(都承旨)로 ≪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한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예조참판,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771년 호조판서 재직시,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 예조,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77년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벽파(僻派)의 모반음모를 여러 차례 적발, 1780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권을 붕괴시킨 뒤, 정조(正祖)를 보필하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국정을 시행케 하였다. 1788년 우의정, 1789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1791년 신해(辛亥)박해가 일어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공서파(攻西派)에 맞서 천주교인을 옹호하여 그 결과로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좌의정에 복직되었고,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 뒤 천주교의 신봉을 어는 정도 묵인하는 온건적 정책으로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여러 번 사직, 또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그 때마다 정조의 신임으로 복직되었다. 사후(死後)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말미암아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관직을 추탈당했으나 1823년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저서로 ≪번암집≫(樊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崔珖, 樊巖 蔡濟恭의 西學觀硏究, 史叢, 제17, 18집, 高麗大史學會, 19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