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승리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척화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1871년 6월 12일(음 4월 25일)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이고, 재료는 화강암이다. 비문에는 큰 글씨로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케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작은 글씨로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씌어 있다. 이 척화비를 건립하고 나서 흥선대원군은 6월 20일 미 군함과의 접촉을 시도했던 이승훈(李承薰)의 증손자 이연구(李連龜) · 이균구(李筠龜)형제를 인천에서 참수하고 이어 7월 16일 미 군함과 접촉했던 우윤집(禹允集) · 최순복(崔順福) · 박상손(朴尙孫) 등의 천주교인을 강화의 갑곶(甲串)에서 참수했으며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후 흥선대원군이 청국으로 납치되자 종로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일본 공사의 요청으로 철거되어 보신각 부근에 파묻혔다가 1915년 발굴되어 경북궁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 이외에 강화 · 동래 · 함양 · 부산 · 경주 등지에도 서울의 것과 같은 척화비들이 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그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