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시우스주의 [한] ∼主義 [라] Photiusianismus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역임하였던 포시우스(Photius, 815경∼897)로 인해 발생한 이교(離敎). 1054년 동방대이교의 원인이 되었다.

귀족 출신이었던 포시우스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 수도생활을 청산하고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 밑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비서와 대사를 지냈던 그는 황제에 의해 파면된 이냐시오(Ignatius)의 후임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냐시오와 포시우스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테오그노스투스 수도원장의 거짓 보고를 듣고 863년 포시우스를 파문하고 이냐시오를 총대주교좌에 복직시켰다. 이어 포시우스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동방교회 회의(867년)에서 교황을 파문하였다. 새로 즉위한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1세가 이냐시오의 편을 들게 되고, 869∼870년에 열렸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의 파문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877년 이냐시오가 죽은 뒤 포시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좌에 올랐고, 교황 요한 8세도 이전의 파문처분을 취소하였다. 그는 서방교회와 대립하는 중에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서방교회의 간섭을 배제하였고, 신경(信經)에 필리오케(Filioque, ‘∼와 성자’를 의미함)를 삽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필리오케’ 삽입문제로 로마를 단죄한 최초의 인물인 포시우스는 ≪Bibliotheca≫, ≪Amphiliochia≫ 등 저작을 남겨 그의 뒤를 이은 많은 동방교회 신학자들이 서방교회의 교리에 반대하는 근거를 제공하여, 13∼14세기 동서교회의 논쟁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빈번히 거론되는 이름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그는 동방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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