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인 힘을 행사하여 다른 사람의 육체나 재산에 해를 입혀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관철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폭력을 하나의 틀 속에 넣어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폭력을 1차적 폭력, 혹은 구조적 폭력과 2차적 폭력, 혹은 대항적 폭력으로 나눈다. 1차적 폭력(구조적 폭력)이란 사회제도나 법률, 정치 권력을 이용,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불의와 부정으로 타인을 구속하는 행위를 말한다. 옛날부터 구조적 폭력은 폭력의 근원으로 존재해 왔다. 향락과 사치를 추구하기 위해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 노예제 사회, 인간을 봉건적 구속으로 묶어둔 봉건제 사회, 인간을 기계화시키는 산업사회에서 폭력은 ‘법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지배계급에 의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인권을 유린하고, 인류를 결국 파멸로 인도할 이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여 싸우며, 구조적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대항적 폭력이다. 물론 대항적 폭력을 두고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악을 근절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을 인정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악의 세력이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을 내리려고 하는 경우에서는 정상시의 도덕률과 윤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 없고, 그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본회퍼(Bonhoeffer)의 주장. 그는 미친 운전사가 버스를 몰아 사람을 살상하는 경우 우리는 그 운전사에게 폭력을 사용하여서라고 그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파쇼정권에 항거하였다. ② 포악한 무리가 연약한 민중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을 때, 분노한 민중더러 가만히 폭력을 받고만 있으라고 하는 것은 민중에게 주체적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기 때문에, 이 경우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에게 항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런 폭력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됨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나 제임스 콘(James Corn)의 주장. 억눌린 사람은 폭력에 항거함으로써 그의 정신상태를 건강하게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③ 사랑의 채찍이라 하여 억눌린 자들이 힘을 모아 대항할 때 강자들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는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말. ④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낡은 생산관계가 발전하는 생산력에 올가미를 씌우는 상태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고수하려는 지배계급을 폭력으로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있다.
이상과 같이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대항적 폭력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고 하는 물음이 잘못된 것이고 “그 방법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악한 제도를 파괴하고 새롭고 선한 내일을 이룩할 수만 있다면 대항적 폭력 그 자체도 선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구조적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며, 이에 대항하는 대항적 폭력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는 반대하는 비(非)폭력의 입장에 선다. 제2차 바티간 공의회는 “평화의 건설을 위해서는 우선 불의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폭력의 방종을 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83)고 선언하였다. 한편 바르트(K. Barth)와 같은 신학자는 한계상황에서는 폭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성전 안의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고 내쫓으셨다(마르 11:15)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 바오로 6세, 평화를 위한 정의의 활동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