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한] ~革命 [프] Revolution francaise

18세기말(1789~179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즈와 혁명. 프랑스혁명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면서 동시에 앙생 레짐(舊體制, ancien regime) 아래서 꾸준히 성장해온 산업자본가가 봉건영주와 성직자들의 지배기반을 파괴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봉건제도의 붕괴과정에서 찾아져야 되겠지만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국가재정의 궁핍, 조세부담의 불공평(귀족과 성직자는 면제, 농민과 시민은 과중한 세부담)과 함께 의회정치를 부르짖는 몽테스키외의 주장, 루소의 성선설(性善說)과 국민주권설, 계몽사상 등의 혁명적인 사상의 영향, 부르봉왕조의 실정(失政)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6세는 귀족(300명), 성직자(300명), 시민(600명)으로 구성된 ‘3부회’를 소집하여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자유주의적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개혁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습격 사건이 터지고, 전국적인 규모로 농민소요와 소생산자 폭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자유주의적 귀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민의회는 봉건제도를 완전히 폐기한다”는 법률혁명(Revolution Juridique)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법률혁명의 한계는 농노제, 영주재판권, 교회의 십분의 일세 등을 폐지했지만 봉건적인 토지소유관계는 그대로 지속시켰다는 데 있다. 1792년 봄 농민봉기는 격화되었고 대외전쟁에 의한 위기의식이 심화되면서 혁명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적 귀족의 손에서 중산 생산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농민, 소생산자들과 연합하여 6월에 봉건지대의 무상폐지를 선언하고, 8월에 왕정을 폐지하여 파리 코뮌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혁명은 1804년 제1제정의 시작과 함께 종언을 고하였다.

한편 혁명의 교회에 미친 영향 또한 대단히 크다. 앞서 말한 십분의 일세의 폐지, 면세특권(免稅特權)의 폐지에 뒤이어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국가가 감독 아래 재산목록이 작성되고 1790년부터 매각(賣却)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2월에는 수도원이 해산당하고, 수도자들은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성직자에 대한 연봉도 폐지되고, 7월의 성직자공민헌장(constitution civile)은 프랑스 교회를 로마에서 분리시켰고, 주교는 개신교와 유대교도 포함된 선거단체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들은 헌장에 선거하기를 거부하였고, 1791년 11월 프랑스 혁명정부는 선서거부자(insermentes)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리고, 1792년 9월부터 혐의자 1,400명을 파리감옥에서 학살하였다(소위 9월 살육).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시복되어 복자의 품에 올랐다. 또 1793년 11월 그리스도교는 폐지가 선포되고 ‘이성의 여신’에 대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1795년 2월 ‘전례의 자유’가 보장되어 종교의 자유도 촉진되었다. 그러나 1797년 다시 공포정치가의 손에 권력이 넘어가고, 외국에서 돌아온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 처형당하였다. 1799년 11월 이후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고, 1801년 콩코르다트협약에 의해 종교적으로 평화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P. de La Gorce, Histoire religieuse de la Revolution francaise, 5v., Paris 1909~1923 / A. Latreille, L’Eglise catholique et la revolution francaise, 2v., Paris 1946~1950 / A. Aulard, La Revolution francaise et les congregations, Paris 1903; Christianity and the French Revolution, tr. Lady Frazen, London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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