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에 창립된 한국의 가톨릭 농민운동단체. 가톨릭 농민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믿음으로 깨어나는 농민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민 자신과 사회를 누룩처럼 변혁시켜 감으로써,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을 지향하는 생활공동체 운동이다. 따라서 가톨릭 농민운동은 농민 안팎에 온갖 반(反)인간적 · 반공동체적 · 반생명적인 ‘세상의 죄’와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대결을 벌이면서, 인간답고 공동체다운 세계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농민들의 삶의 표현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권익을 옹호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신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회칙 제3조).
1. 활동과제 : ① 현장활동 : 삶의 현장인 마을에서 부락민의 일상적 요구에 응답하면서, 마을을 생활공동체로 변화시킨다. 경제적 협동활동(생산, 소비, 유통, 신용, 이용 등의 협동화), ② 문화활동(생산과 문화, 일과 놀이와 전례의 일치를 시도함으로써 인간다운 공동체문화의 회복 및 창조), 봉사활동(특히 소외된 이웃과 고락을 나눔), 권익활동(반농민적 지배 등에 저항하며 농민 권익 옹호에 앞장섬), 마을민주화활동(평등구현 및 마을자치역량을 키움), 건강활동(무공해 농사 실천으로 땅과 식탁 살리기, 자연요법 개발 및 보급, 반공해활동 등), 연대활동(농촌 및 도시공동체와의 생활연대) 등을 추진한다. ③ 정책활동 : 농민을 비인간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는 활동을 통해, 공동선(共同善)을 확장시킨다. 농지제도 개선 활동, 농축산물 가격보장 활동, 농민조합의 민주화활동, 부당한 농업세제시정활동 등을 추진한다. 현장활동과 정책활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운동의 저항성과 공동체성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조직 : 조직 형태는, ‘분회’(마을, 공소단위) ⇒ ‘지역협의회’(생활권, 본당단위) ⇒ ‘연합회’(도, 교구단위) ⇒ ‘전국본부’(대의원총회, 회장단, 이사회, 감사회, 사무국)이다. 조직 운영은 다음과 같다.
3. 활동약사 : ① 태동기(1964. 10∼1971년)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농촌청년부로 출발해서 1966년 10월에 창립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는, 농촌청년 중심으로 모범생활, 모범농사 등을 통한 마을 환경의 변화를 추구했으며, 주로 생활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농업 희생이 강요되기 시작한 1, 2차 경제개발계회(1962∼1971년)의 추진, 3선 개헌(1969년), 비상사태 선포(1971년) 등으로 나타남 권력독점의 심화, 농민개인과 정치경제 사회구조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모범농촌청년, 모범농장도 불가능함을 인식, 농촌청년만으로는 농민문제 해결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운동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가톨릭농민국제연맹’(M.I.J.A.R.C)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② 성장기(1972∼1980. 5. 17) : 자본주의의 농업 · 농민문제를 발견하고, 농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업 ·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새 운동방향을 확정, 1972년 1월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하면서 범농민운동체로 새출발하였다. 유신헌법(1972년) 긴급조치시대, 저노임 · 저곡가를 강제한 경제정책 강행 등으로 대외 의존이 심화되면서 기층국민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2차 경제개발계획에는 명목상으로나마 ‘식량자급’ 정책이 있었으나, 3차에는 ‘주곡자립’으로, 4차에는 ‘생산기반확충’으로 뒷걸음질 쳐 적자농사, 농가부채의 급증, 대량이농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1974년 민간단체로서는 최초의 ‘농지임차관계조사’를 통해 토지문제를 제기했으며(소작농 29.1%, 부재지주 39.8% 등), 1975년부터 쌀생산비 조사를 통한 농산물 가격 보장활동을 하였다. 현장에서 또는 전국단위로 외곡수입 반대운동, 강제농정 시정활동, 부당농지세 시정활동, 농협민주화활동 등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수매를 이행치 않음으로써 발단된 ‘함평 고구마사건’(1976∼1978)은, 사건 발생 2년 만에 농민의 승리로 끝났고, 이를 계기로 농협의 고구마 수매 80억원 부정이 폭로되었다. 또한 감자 계약수매 불이행으로 발단된 ‘안동 농민회사건’(세칭 오원춘사건, 1979년)은 숱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농민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두 사건은, 농민운동사에 길이 기억될 사례이다. 10.26사태 후,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전국 농민대회’, ‘농민관계법령공청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 ‘국제가톨릭농촌단체연합회’(I.C.R.A)에 가입하였고 1976년 가톨릭농민회 10주년기념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③ 성숙을 지향하며(1980. 5.17 이후∼1983년) : 농민의 복리를 위한 국내유일의 농민운동체로서 1970년대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운동의 미성숙함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운동의 역사성, 운동의 생명성의 결함을 깊이 성찰하면서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 · 우주구원을 하나로 꿰뚫는 성숙한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그 새 출발을 시도하였다. ‘농촌사회의 민주화’, ‘공동체 삶의 실천’이 활동목표이다. 1981년 대전에 농민회관이 건립되었고, 1982년 충북 음성에서 ‘부당농지세 시정을 위한 농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농지임대차양성화 저지활동(1982년), 전국 천주교 농촌공소실태조사(1982∼1983년), ‘농협조합장 직선제실시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1983년) 등을 추진하였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이 땅 이 겨레에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고자,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 되고자, 공동체적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대결과 건설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를 따르고자 전력하고 있다. (⇒) 가톨릭농민회 (鄭鎬庚)
[참고문헌] 한국가톨릭 농민회 보고서, 1966∼1983 / 농촌청년, 회지, 1968∼1974 / 농민회활동 사례집, 1, 2회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