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한] 興宣大院君

흥선대원군(1820∼1898). 이름은 하응(昰應), 자(字)는 시백(時伯), 호(號)는 석파(石坡). 영조의 손자이며 고종의 아버지.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고, 1863년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이어 섭정(攝政)을 맡았다. 세도정치의 아성(牙城)이라 불리던 안동 김씨 일파를 숙청하고, 신분 · 계급 ·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 부패관리의 숙청, 서원 철폐, 법률 정비 등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였고, 혁신적인 개혁책을 펴 조선후기 몰락하는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경복궁(景福宮)의 중건(重建)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특히 쇄국정책을 고집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면치 못하였다. 집권 10년간 대원군은 천주교인에 대한 가장 잔인한 박해자로 군림하였다. 병인(丙寅) 대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2명의 주교, 7명의 신부를 위시한 수천명의 천주교인을 학살케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도 초기에는 천주교인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모든 선교사들의 체한(滯韓)사실을 묵인했고 북방으로부터 침략해 오는 러시아인들을 대비하여 당시 조선교구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주교에게 두 차례(1864, 1865년) 협조를 청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이 서양의 어느 나라와도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고 판단, 대원군과의 교섭으로 종교자유를 얻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종교자유를 얻는 방법으로는 프랑스 함대의 상륙 밖에 없다고 하여 대원군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포교정책과 결부된 식민지정책에 어느 정도 동조한 천주교 서양선교사들의 잘못된 인식은 그렇지 않아도 “선교사의 보호란 정복자의 구실이요, 선교사란 정복자의 전위이며, 동조자요, 협조자”라고 생각, ‘천주교는 나라와 왕조의 적’이라고 낙인찍으려 했던 반천주교적인 재상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박해를 유치하는데 좋은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와 함께 북경함락(1860년) 이후 1862∼1873년에 계속된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이들의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와 교섭하려는 대원군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나섰으며, 선교사와 신도들의 처형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마침내 대원군도 선교사 체포령에 서명하였다. 병인박해의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쳤다. 한편 10년 동안 형성된 반(反)대원군 세력은 1873년 그를 권좌에서 내몰았다. 그는 임오군란(1882년)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나 민비의 책동으로 청나라에 잡혀가 4년 동안 유폐되었다가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다가 1898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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