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미술은 어디에 그 원천을 두고 있으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역사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숨어서 예배를 본 지하묘지(地下墓地)의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어두움 속에 갇혀진 신도들의 빛을 바라는 애원이었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자로의 소생, 마비된 환자의 쾌유(快癒), 사자 우리 속의 다니엘, 바다의 고물에게 던져진 요나스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지하 묘지의 미술은 장례의 미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당신이 바다의 괴물에게 던져진 요나스를 구하였듯이 그의 영혼도 구해 주소서” 하는, 죽은 자의 영생(永生)을 바라는 기도문은 2세기 말 소아시아의 그리스의 옛 도시인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인(聖人) 치프라노(Cyprianus)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지하묘지의 그림은 그와 같이 그리스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로마의 지하묘지 벽면에 그려진 장면은 이미 동방의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에서 보여진 것이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교회에 대한 박해가 지속될 때까지 장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술이 역사적인 것으로 될 수 있게 된 것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의 평화를 보장한 후부터였다. 광명을 찾은 그리스도교 미술은 그 때부터 복음을 묘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동방의 그리스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에페소(Ephesus) 등의 도시에서 나타났다. 오늘날 그것이 고증(考證) 된 것은 석관(石棺)의 부조(浮彫)와 상아로 된 함의 부조이다. 석관에 부조된 수난의 장면은 그리스도를 고대 그리스의 영웅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방의 그리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을 닮은 초기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창조하고 있는 동안, 시리아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는 또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교 미술이 출현하였다. 326년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무덤과 십자가가 발견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묘(聖墓) 자리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승리’를 뜻하는 기념비적인 원형의 건물(Rotonde de Anastasis)을 건립하고, 이어 십자가가 발견된 건너편에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순교자의 대성전(Martyrium)을 세웠다. 이에 따라 복음성서에서 성역화(聖域化)한 올리브산(山), 시온산, 베들레헴, 나자렛, 요르단 강변에는 성전(聖殿)이 건축되고, 내부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기시키는 내용의 모자이크가 장식되었다. 이 건물들은 6세기 말까지 모두 완공되었다. 여기서 보여지는 미술은 그리스 사람들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모습은 청년상(靑年像)이 아니고 수염을 기른 성인상이며, 동정녀 마리아는 긴 면사포로 머리를 덮은 나자렛의 소녀상을 보여 준다. 팔레스티나 미술은 사실적(事實的)이었다. 이렇듯 6세기에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미술이 그리스와 시리아가 각기 다른 표현으로 복음성서를 통하여 성상(聖像)을 보여 준 것이다. 복음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스는 이상적이고, 시리아는 사실적이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미술과 시리아 미술은 그 뒤 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6세기의 비잔틴 미술은 조형(造形)보다도 장식성을 택함으로써 모자이크 미술의 화려한 등장을 보였다. 페르시아에 군림한 비잔틴 황제들은 그곳의 궁전이 화려한 색채로 장식되었음을 보고, 조각 대신 색채로 된 장식을 그들의 성전에 도입한 것이다. 동방 취향의 이러한 장식적인 미술은 근 500년 동안 그리스도교 미술을 지배하였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건축의 원형(圓形) 형식을 성묘 위에 건립한 성전에 적용한 뒤부터, 교회 건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표상(表象)해야 한다는 이탈리아의 성인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의 가르침에 따라 “십자형이 성전이 된다”(Forma crucis templum)는 교회 건축형식의 기본이 마련됐다. 이 형식은 그 한세기 뒤에 세워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Sta. Maria Maggiore) 대성전과 산타 사비나(Sta. Sabina) 성당의 건축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또 비잔틴 제국의 교회 건축도 십자형의 기본성에 입각한 원형 지붕을 갖게 되었다.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5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 하였던 그리스도교의 조각 미술이 재생(再生)한 곳은 프랑스의 남부 도시 툴루즈(Toulouse) 의 도라드(Daurade) 수도원이었다. 그곳의 안뜰을 둘러싼 회랑(回廊)의 주두(柱頭)에 조각을 세겼는데 그것은 1060년경의 일이다. 또 그 지장의 므와사크(Moissac) 수도원 안뜰의 주주 조각도 1100년에 제작된 것이다. 주두는 복음을 부조로 전달하고 있으며 성인의 생애를 새로운 도상(圖像)으로 나타내 그들의 미덕을 알려 준다. 주두 조각에 이어 신자에게 신앙심을 복돋아 주는 조각은 ‘최후의 심판’을 표현한 성당 정면 문 위의 삼각형 벽면(Tympan)이다. 심판자인 신은 엄숙하게 네 마리의 동물과 24인의 노장(老壯)으로 둘러싸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인다. 문 입구의 벽면은 악덕의 부자, 덕과 악의 싸움 등이 부조로 묘사되어 인간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비유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이러한 성당의 건축조각은 12세기에 이르러 성지 순례의 길을 따라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순례의 길은 로마와 스페인의 생 자크 드 콤포스텔(Saint Jacques de Compostelle)로 향하는 여정(旅程)이며, 그곳 지방도시들에 성당이 건립되어 이 시대의 종교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13세기의 미술은 12세기에 구상한 에술 소재를 완성하고,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13세기 교회의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네 분야로 크게 정리하였다. 신부인 뱅상 드보네(Vincent de Beauvais)에 의하여 제시된 네 분야는 큰 거울(speculum majus)이라는 명칭 아래 자연, 학문, 도덕, 역사로 나눈 조형세계를 종교건축에 반영시켰다. 자연의 거울은 자연의 창조물인 동식물 등이고, 학문의 거울은 노동과 사상인데 거기에는 농부의 일, 또는 철학이 형상화되는 것이다. 도덕의 거울은 모든 덕을 의인화(擬人化)하여 표상하고, 역사의 거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 신약성서를 대조시킨다. 이 시대의 대성당은 문 입구의 외벽에 성서를 조각하여 예언자와 사도, 성인상등이 신자들을 맞이한다. 한편 그리스도의 생애는 교회의 지시에 따라 주로 성탄과 수난을 묘사한다.
다음은 세속사(世俗史)를 나타내는 사도, 성인, 순교자, 성직자들의 모습이 입상(立像)으로 크게 대성당 입구의 벽면을 채우고, 이들의 행적은 색그림 유리창으로 이야기를 전하여 준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념적인 역사는 성당건축을 중심으로 조각, 색그림 유리창이 전달한다. 이 역사를 매듭지어 주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나타내는 조각이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성당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보여 주는 책이 되고 있다. 14, 15세기의 미술을 앞두고 13세기 미술은 지성에 호소하였고, 그리스도교의 신성(神性)을 표현하였으며, 사람들을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이 미술은 그 뒤 감성(感性)에 호소하게 되고 인간적인 면을 표현하며 고난의 아픔을 보여 주는 것으로 된다. 13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미술가 치마부에(Cimabue), 지오토(Giotto), 시엔나(Sienna) 화파(畵派)는 정적(靜的)인 표출(表出)을 하는데, 이것은 동방 그리스도교 미술에 의한 것이다. 시리아풍(風)의 리얼리즘은 수난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서구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리얼리즘이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이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의 사랑과 신앙심에서 찾게 되고, 그의 길을 따르는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에 의한 결과였다. 이 수도회에서 편성한 《그리스도 생애의 묵상》(Medi tation sur la vie de Jesus-Christ)이라는 책은 감정적인 묘사로 가득차 있다. 예를 들면, ‘성모영보’의 장면은 무릎을 꿇고 있는 천사로 되고, ‘성탄’은 내조(來朝)한 삼왕(三王)이 아기의 발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인다. 또한 13세기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은 성모가 아기를 존경하듯이 성스러운 자세로 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여기서는 모자가 미소를 주고받고 있는 인간적인 애정을 보인다. 특히 수난의 비애와 고통의 묘사는 14, 15세기에 이르러 일반화된다.
프랑스에서의 조각의 재생은 성당건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1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성지순계는 로마와 스페인,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성묘(聖墓) 건축과 원형 지붕의 건축 등을 모방하는 성당이 건립되어 많은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되었다. 이 당시의 종교 건축미술을 로마네스크(romanesque art) 양식이라고 하였으며, 이 양식은 11, 12세기에 걸쳐 전개되었다.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수도원이고, 여기에 베네딕토회(Benedictin)와 클뤼니(Cluny)회가 로마네스크 시대의 종교 건축의 성격을 확립한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내부의 천장이 반원통(半園筒)이고 주랑(柱廊)과 측랑(側廊)으로 형성되어, 그 하중(荷重)을 받쳐 주는 기둥은 아치로 연결되고, 두꺼운 벽이 이 모든 것의 힘이 되어 있다. 건축은 물론 십자형을 기본으로 한다. 이 건축은 고딕(gothique) 미술로 계승되어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발전을 보였다. 전자가 무겁고 검소한 데 비하여, 후자는 경쾌하고 장식적이다. 예를 들면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대성당이 그 초기의 것이다. 고딕 미술은 프랑스 고유의 것이며, 그 특징은 꺾어진 아치(Are-crise)형과 교차궁륭(交叉穹窿)의 천장(voute-sur-croisees-d’ogives)과 버팀벽의 구실을 하는 아치 모양의 지주(arc-boutant) 등으로, 이것이 고딕건축의 기본요소이다. 순수한 종교미술인 고딕양식이 발전하고 있는 동안, 1,400년대의 이탈리아 미술은 르네상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합리주의에 입각한 과학적인 것이었다. 르네상스 미술은 원근법(遠近法), 명암법(明暗法), 인체 해부, 비례법 등을 출현시켰다.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뒤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의 미술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계승하여 바티칸궁을 그림으로 장식하고, 작품 <성체에 대한 논쟁>(Dispute du Saint-Sacramemt)을 보여 주었다. 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바티칸궁의 시스티나 성당을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등의 벽화로 장식하여 그리스도교 신자의 전통적인 정신을 반영하였으나, 르네상스 미술의 과학성을 적용하였다.
그리스도교 미술사에 큰 사건을 기록케 한 것은 종교개혁 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채택한 종교 내부의 개혁과 규율이었다. 교회는 여기서 미술의 방종한 상태를 통제하여 새로운 도상(圖像)을 추구하였다. “교리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규율은 주관적인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미술을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의 부정의 대상이 되었던 성모, 성인, 교황권, 전례(典禮)등을 수호하고, 또 공경하도록 하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요청되었다. 이 미술의 특징은 신앙의 절정을 나타내는 법열(法悅)이다. 베르니니(Bernini)의 <법열의 성녀 데레사>, 스페인의 작가 리베라(Ribera)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법열> 등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결국 감동적 성격을 나타내고 신앙의 척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된다. 이러한 감흥적인 상의 미술은 한편 마니에리즘(Manierisme)과 바로크(baroque)풍의 표현형식을 갖는다. 건축은 십자형을 기본으로, 둥근 지붕의 옛 로마 시대의 형식을 발전시킨 성당이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하였고, 그 중에서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1506년에 착공되어 로셀리노(Rossellino),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 베르니니 등의 설계에 따라 건축되었다. 그 뒤의 교회건축은 여러 시대를 통하여 제시된 양식을 도입하거나 절충한 것이며, 그 장식이나 부분적인 면에서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결국 근대까지의 종교미술은 서구의 미술을 풍성하게 하고,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지하묘지의 장례의 미술에서, 교회의 평화가 약속된 이후의 역사화된 미술, 백과전서적인 13세기의 미술, 프란치스코 수도외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의 정열적이고 애정 어린 미술, 이성 속에서 신앙의 빛을 보이는 르네상스, 신앙의 불꽃을 존중하는 17, 18세기까지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흐름은 비록 그 양상에 차이는 있지만 교회의 이념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고한 사실은 고대의 동방 그리스지방과 시리아에서 표상한 도상이 종교미술의 역사를 통하여 성상의 기본이 되고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종교미술의 색채를 띠고 있던 서구 미술은 미술 본래의 문제와 세속적인 성격을 추구하게 된다. 이 현상은 인간의 가치관이 변동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난 날과 같은 체계적인 종교미술은 볼 수 없고 미술 자체의 표현 유형(類型) 안에서 한 작품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보였다. 이를테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인 <황색의 그리스도>(Le Christ jaune, 1898) 또는 루오(Rouault)의 <성안>(聖顔, La Saint Face, 1933) 등이다. 건축도 새로운 재료의 생산으로 건축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사회적 기능과 성격을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그 양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1950~1955년에 건축한 프랑스 롱샹(Ronchamp)의 성모성당을 볼 수 있다. (林英芳)
[참고문헌] Emile Male, L’Art religieux du 12 siecle en France, Ed. Amand Colin, Paris 1947: L’ Art religieux apres le Concile de Trente, Ed. A. Colin Paris 1932; L’Art et artisres du Moyen Age, Ed. A. Colin, Paris 1947 / Louis Reau, L’Art et du Moyen Age, Ed. Albin Michel, Paris 1951 / Henri Focillon, Art d’Occident, Ed. A. Colin, Paris 19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