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한] ~新聞

대구(大邱)대교구 산하 가톨릭신문사에서 간행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주간신문. 1927년 4월 1일 대구교구 청년연합회에서 월간지로 <천주교회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으나 1933년 폐간되었다가 1949년 다시 복간되었다. 1953년 <가톨릭신보(新報)>, 1954년 <가톨릭시보(時報)>, 1980년 <가톨릭신문>으로 각각 바뀌었다. 지면도 창간 당시의 4 · 6배판 4면에서 1928년 태블로이드판으로, 다시 1959년 배대판으로 확장되었다. 또 창간 당시 매달 1일 발행의 월간지에서 1951년 격주간지로, 1960년 다시 주간지로 증간되어, 현재 초교구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배대판 8면의 주간신문 <가톨릭신문>으로 정착되었다. <가톨릭신문>의 역사는 창간 이후 현재까지 그 발전 경과와 양상을 근거로 하여 초창기(草創期, 1927~1933년), 중흥기(中興期, 1949~1959년), 발전기(發展期, 1960~현재) 등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초창기(1927~1933년) : 1924년 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남방천주교청년회’(南方天主敎靑年會)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어 사회 · 교육 · 출판사업을 사업목표로 활동하게 되었고, 그러한 대구교구 청년운동의 하나로 1927년 4월 1일 <천주교회보>가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의 발행인은 대구교구 부주교 겸 계산동 주임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 편집대표에 청년회장 최정복(崔正福), 편집위원은 윤창두(尹昌斗), 서정섭(徐廷燮) · 최재복(崔再福) · 이효상(李孝祥) 등이었고 뒤에 이인복(李仁福) · 김주석(金周錫) · 김구정(金九鼎) 등이 편집위원으로 추가되었다. 크기는 창간 당시 4 · 6배판 4면이었으나 창간 1주년 기념호인 1928년 4월 1일자 제13호부터는 태블로이드판으로 지면이 확장되었고, 또 매년 창간기념호 때는 6면 내지 8면의 증간호가 간행되었다.

그 뒤 <천주교회보>가 발전을 거듭하자 1931년 7월 7일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천주교회보>를 대구교구의 기관지로 인정하는 공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천주교회보사(社)를 발족시키고 사장에 계산동본당 주임 페셸(Peschel, 白鶴老) 신부, 부사장에게 계산동 본당 보좌 장순도(張順道) 신부를 각각 임명하고, 또 재정난을 덜기 위해 초대 발행인이었던 베르모렐 신부를 후원회장으로 하는 후원회를 조직한 후 이듬해 귀국하는 페셸 신부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줄리앙(Marius Julien, 權裕良)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교구당국과 후원회의 활동으로 <천주교회보>는 재정난을 극복하고 2,000부를 발행하며 멀리 중국, 만주, 하와이에까지 독자를 갖는 잡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3월 6일 서울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3월 18일자로 된 <가톨릭 액션에 대해>라는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교회내의 기존의 청년잡지를 통 · 폐합하여 새로운 청년지 <가톨릭靑年>을 창간한다는 원칙을 발표하자 <천주교회보>는 동년 4월 1일자 창간 6주년 기념 제73호를 끝으로 당시 서울교구에서 간행되던 청년지 <별>과 함께 폐간되어 1949년 복간될 때까지 15년간의 긴 공백상태를 갖게 되었다.

2. 중흥기(1949~1959년) : 1948년 9월 발족된 대구교구 가톨릭 청년연합회는 1949년 1월 15일 완전한 결성을 마친 뒤, 첫 사업으로 <천주교회보>의 속간을 결의하고 때마침 성성된 신임 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의 임석하에 임시총회를 열어 <천주교회보>의 속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천주교회보>는 발행인 최정복, 편집인 윤광선(尹光宣), 발행소 대구교구 가톨릭청년연합회로 하여 1949년 4월 1일자 제74호가 복간되었고, 속간에 있어서 조국성화(祖國聖化)라는 또 하나의 간행목적이 첨가 되었다. 그 뒤 1949년 7 · 8월호가 출판허가와 인쇄문제로 휴간되었으나 이해 8월 8일 정기간행물 발행 허가를 받아 제77호가 간행되었고, 동시에 청년연합회에서는 교구당국과의 합자로 주교관 구내에 대건(大建) 출판사를 설립하고 <천주교회보>의 인쇄를 담당케 하여 이를 계기로 <천주교회보>의 지면은 4면에서 6면으로 확장되었다.

1950년 6.25동란으로 대건출판사가 공군(空軍)인쇄소로 징발되자 이해 6~9월호까지가 휴간되었으나 곧 복간되었고, 그 후 1951년 교구당국은 <천주교회보>의 경영권을 청년연합회로부터 인수, 사장에 최민순(崔玟順) 신부, 편집국장에 윤광선, 인쇄국장에 오창수(吳昌洙)를 임명하여 천주교회보사의 운영을 성직자와 청년연합회 간부들이 공동으로 맡게 했고, 또 발행횟수를 늘려 월간에서 격주간으로 증간케 하였다. 이어 1953년 3월 7일자 제122호부터는 제호가 <가톨릭신보>로 개칭되었고, 다시 1954년 1월 15일자 제137호부터 <가톨릭시보>로 바뀜과 동시에 <가톨릭시보>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의무가 교구당국으로부터 가톨릭시보사(社)로 이양되었다.

1955년 6월 인쇄를 담당하던 대건출판사가 파산되자 그 후로 1년간 <가톨릭시보>는 부정기적으로 간행되다가 1956년 10월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C.C.K)와 교구당국의 찬조금으로 대건출판사 자리에 인쇄시설이 마련됨으로써 정기적으로 간행되었고, 그 뒤 1959년 10월 11일자 제204호부터는 지면이 태블로이드판에서 배대(倍大)판으로 확장되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3. 발전기(1960~현재) : 1960년 1월 3일자 제210호부터 <가톨릭시보>는 격주간에서 주간으로 증간되었다. 이미 전년(前年)에 지면이 배대판으로 확장되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자유당(自由黨) 정권의 탄압, 만성적인 재정난 등의 어려움 속에서 주간신문으로서의 정착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1961년 11월 가톨릭시보사는 편집국과 업무국을 대구시내 남일동(南一洞)의 대구매일신문사 사옥으로 이전되어 1950년 12월 이래 대구교구에서 경영해 온 대구매일신문사의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어 이듬해 5월부터는 경영의 합리화를 위해 대구매일신문사 사장 김영호(金永浩) 신부가 사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4년 1월 다시 대구매일신문사와 경영이 분리되어 대구교구 경리부장 신현옥(申鉉玉) 신부가 사장을 겸하게 되었고, 이해 6월 김수환(金壽煥) 신부가 사장에 취임한 뒤로는 착실한 제작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정착 · 신속한 보도로 인해 6,000부에 불과하던 발행부수가 2만부로 급증하게 되었다.

그 뒤 1965년 12월 25일 지령(紙齡) 500호, 1967년 3월 7일 지령 1,000호를 기록하고 1980년 4월 6일 창간 53주년을 기해 제호가 현재의 <가톨릭신문>으로 바뀌었고, 이어 1982년 1월 8면으로 증간되어 현재의 배대판 8면의 주간신문 <가톨릭신문>으로 정착되었다.

4. 사료적 가치 : <가톨릭신문>의 사료적 가치는 1927년 창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간행을 지속해 왔다는 데에 있다.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 창간되어 60여년 동안 한국교회 · 한국 민족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그것을 기록해 왔다는 점에서 <가톨릭신문>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연구 · 정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집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제시대 교회에 대한 탄압과 교회활동에 대한 자료(가톨릭 액션, 복음전파,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한국 최초의 공의회 등), 6.25동란 뒤의 교회활동에 대한 자료(지식인 개종, 수도회의 진출과 창설, 교구 · 본당의 증설, 교계제도의 설정 등),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자료, 그 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교회활동에 대한 자료(이 시기 특히 한국의 역사현실, 정치현실 속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사회불의를 고발하고 인간존엄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자료) 등, <가톨릭신문>은 이러한 지난 60여년간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과 생동하는 교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교회사료의 총집합체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崔奭祏,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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