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사건 [한] ~事件 [영] Galilei case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에 관한 사건, 갈릴레이는 1609년 갈리레이식 망원경을 발명, 천체를 관측한 결과를 가지고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천동설(天動說)을 부정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신학자들은 성서를 근거로 하여(여호 10:12, 집회 1:4), 갈릴레이를 비난하였다. 검사성성(檢邪聖省)은 사정을 상세히 조사한 뒤 1616년 교령을 발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궤도의 운행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aelestium), 포스카리니(Foscarini)의 ≪욥기주해서≫, 디다쿠스 아 스투니카(Didacus a Stunica)의 ≪욥기주해서≫ 등 3권을 금서 처분하고 갈릴레이에게는 침묵의 의무를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가설(假說)로서만 가르칠 것을 약속하였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결정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632년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코페르니쿠스설을 비교한 ≪2개의 주요체계에 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를 발표, 노골적으로 코페르니쿠스설을 옹호하였다. 갈릴레이는 다시 소환되어, 검사성성에서 22일 동안 구류처분을 받고 갇히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증명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갈릴레이는 풀려났다. 위의 책은 금서 처분되었다가 1835년 코페르니쿠스 문헌과 함께 해제되었다. 1642년 갈릴레이가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사건은 끝났지만, 그 파문은 컸다. 즉 이 사건을 통해 과학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던 중세 가톨릭의 소극적인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종교는 과학과 대립하거나 적대적인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보완적인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물론 사건 당시 관여했던 로베르 벨라르미노 같은 이는 “태양이 고정되어 있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되어지는 성서는 다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여 과학의 성과에 대한 적극적 수용의 자세를 보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분위기에 묻혀 발현되지 못하였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갈릴레이의 명예는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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