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포사건 [한] 江景浦事件

교안(敎案)의 하나로서 1899년 4월 4일 충남 강경에서 그 곳 주민과 나바위본당 주임 베르모렐(Vermorel, 强若瑟)이 외교인 조흥도(趙興道)에게 소금을 사고 값을 지불하지 못해 시비가 일어남으로 해서 비롯되었다. 김치문이 베르모렐 신부를 찾아가 조흥도가 천주교인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호소하고 물러가자 베르모렐 신부는 즉시 조흥도를 잡아들여 진상을 물었다. 조흥도가 이를 부인하자 김치문과 대질시키기 위해 김치문을 수소문해 찾는 한편, 그날 밤 조흥도를 한 객주에 잡아 두었다. 이튿날인 4월 5일 베르모렐 신부의 처사에 흥분한 군중들이 강경과 황산에서 밀려와 복사(服事)와 마부에게 폭행을 가하고 베르모렐 신부는 은진군수(恩津郡守)를 찾아가려 했으나 가는 도중 군중들에 의해 다시 강경포로 끌려왔으나 은진군수를 만날 수 있어 그 날밤 무사히 나바위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베르모렐 신부의 귄한을 모르는 전주(全州)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는 4월 6일 서울 주교관에 베르모렐 신부의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보두네 신부의 전보를 받은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외부(外部)에 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외부에서는 충남과 전북의 관찰사에게 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명령, 충남 관찰사 정주영(鄭周永)이 군대를 이끌고 강경포로 갔으나 베르모렐 신부는 이미 귀환했고, 소요도 진정되었으므로 군대의 철수를 지시하고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보고했고, 외부에서는 이를 다시 프랑스 공사에게 통첩하였다. 그러나 은진군수가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 중, 베르모렐 신부는 상해(傷害)당한 일이 없다는 것에 베르모렐 신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프랑스 공사를 통해 외부에 항의하였으나 외부에서는 조흥도의 무리가 조흥도가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구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다만 기물을 부수고 여럿에게 중상을 입힌 것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엄히 다스릴 것이고 베르모렐 신부도 죄 없는 평민을 잡아들여 구금시킨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프랑스 공사는 다시 항의하고 주모자의 처벌과 손해배상, 지방관의 견책을 요구하며 한성재판소에 소송을 제기, 사건은 교회측과 정부측 간의 문제로 확대되어 6월 7일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을 시작하여 7월 10일 주모자 최성진, 윤성여 등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고 일부는 방면되었다. 그러나 최성진, 윤성여 등이 불복, 평리원(平理院)에 상소했고, 프랑스 공사도 일부 범인들을 석방한 것에 대해 상소, 결국 10월 5일 평리원에서는 최성진과 윤상여에게 태장 1백 대와 징역 15년, 천장옥에게 태장 1백 대와 징역 10년의 최종 판결을 선고하여 사건은 6개월 만에야 마무리짓게 되었다. 최종판결 후 곧 교회의 요청으로 최성진, 윤성여, 천장옥 등은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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