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룸바노 외방전교회 [한] ~外邦傳敎會 [영] Columban Fathers(S.S.C.)

성 골룸바노회는 1918년 아일랜드의 갤빈(E. Galvin)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갤빈 신부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의 중국 선교활동을 통해 그 곳에서의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 외방전교부를 두게 되었는데 골룸바노회는 아일랜드의 성인인 골룸바노를 주보(主保)로 모시고 이어 1916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진출 : 골룸바노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으로 이 해 10월 29일 그리스도왕 축일에 제1진 10명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맥폴린(McPolin, 林) 신부 등 이들 10명의 신부들은 우선 목포시 산정동(지금의 성 골룸반병원)에 본부를 두고 주로 전라도와 제주도의 서쪽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이 지역 교세는 본당이 6개소(목포, 제주,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 광주, 나주, 순천) 뿐이었고 교우 수는 2,884명에 불과하였다. 이 회는 1937년 설정된 광주교구와 1939년 설정된 춘천교구의 사목을 각각 맡아 역대 교구장직에도 동회 회원이 착좌하였다. 또한 1971년 분리 신설된 제주교구에서도 이 회 회원인 헨리(H. Henry, 玄)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에는 시련도 많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른바 적성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1950년의 한국전쟁 때는 공산당들에게 체포되어 학살까지 당하고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일본 당국은 2차 대전이 그들에게 패퇴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1945년 5월 29일 목포에 연금 중이던 아일랜드 신부 11명을 강원도 홍천에 옮겨 가두었다. 이들은 2차 대전이 종료되자, 다시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의 고초는 그러나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산당에게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나머지 2명은 북한으로 납치돼 갖은 고초를 다 겪었던 것이다. 살해된 신부는 브레난 몬시뇰, 쿠색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콜리어 신부, 미긴 신부, 테일러 신부, 캐나반 신부 등 7명이며 납치되었던 퀸란 주교와 크로스비 신부는 유명한 ‘죽음의 행진’을 겪고 시베리아를 경유, 모스크바를 거쳐 기적적으로 고국에 생환할 수 있었다. 그 뒤 퀸란 주교는 1953년 10월 주한교황사절 서리직과 춘천 교구장직을 맡아보다가 1970년 12월 이 땅에서 선종하였으며 크로스비 신부는 당시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사목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이 회는 현재 한국에 담당교구인 춘천교구를 위시하여 7개 교구 61개 본당에서 사목활동과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성당신축의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재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140에 외방전교부 한국지부가 있다.

또한 골룸바노회는 현재 855명의 회원사제들이 전 세계 14개국에 나가 활약하고 있으며 이 회가 운영하는 3개 신학교(아일랜드 1, 미국 1, 호주 1)에는 약 70명의 신학생들이 사제에의 길을 걷고 있다.

[참고문헌] カトリック大辭典, 1965 / 서울 大敎區總攬資料,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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