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Martin

  마르틴 루터 Luther, Martin

  마르틴 루터는 1483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1505년 이래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505년 7월 2일 그의 생명을 위협한 뇌우를 만난 후 수도승이 될 것을 서원하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507년 루터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서품 후 에르푸르트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508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신설 대학에서 윤리 신학을 강의하는 강사직을 획득하였고, 나중에는 에르푸르트로 되돌아왔다. 1512년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무렵 루터는 구원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준 ꡐ탑의 체험ꡑ 사건을 겪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6세기 초엽에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건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사를 공표하였다. 교황 레오 10세 역시 1515년 3월 13일 반포한 대사 칙령을 통해 이러한 대사를 재확인하였다. 독일 지역을 위한 교황의 대사 위원으로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가 임명되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1513년에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514년에는 마인츠(Mainz)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그는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주교직도 겸직하였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대사 위원회의 직책을 획득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 소재하는 푸거(Fugger) 은행으로부터 29,000금화를 신용 대출받아 로마로 송금해야 하였다. 로마는 알브레히트에게 8년간 대사 설교를 통해 마련하게 되는 수입을 양도하여 부채를 갚게 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독일의 대사 설교가로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승 테첼(Tetzel)이 임명되었다. 테첼의 설교는 신자들 사이에 대사의 효과에 대한오해를 불러일으켰다.


  1517년 9월 4일 루터가 발표한 반스콜라 신학의 명제들 – 이 명제들은 원본이 1983년 발견된 바 있다 – 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루터가 발표한 명제들은 그 당시 학자들이나 정치가들로부터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였다. 이 명제들은 그 당시의 신학이 추구하던 노선을 포괄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명제들은 나중에 개신교의 신앙 규범으로 발전하게 될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변두리의 도시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비텐베르크의 대학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역사가 일천한 대학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루터의 명제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대사의 효력에 관한 95개의 명제들 – 라틴어로 작성됨 -을 관할 주교, 즉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이자 동시에 대사 위원이었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송달하였다. 동시에 루터는 이 명제들에 대한 토의를 요청하였다. 또한 루터가 속해 있던 수도회의 장상 슈타우피츠(Staupitz)에게 95개의 명제를 송부하면서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도 동봉하였다. 그리고 95개의 명제와 관련해서 교황의 결정에 복종할 각오가 디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루터의 명제에 대해 로마에 보고하였고, 이로써 이단의 혐의로 루터에 대한 심문의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518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가예타노(Cajetan)는 루터를 심문하였다. 하지만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1518년 10월 16일 루터는 교황에게 상소를 제기하였고, 11월 28일에는 보편 공의회에 제소하였다. 1519년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있었던 루터와 에크(Eck) 사이의 논쟁이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편 공의회의 구속력과 다른 권위의 구속력을 부인하였다. 1520년 루터는 교황의 교도권, 미사, 성찬 전례의 성변화에 따른 본질의 변화 – 루터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 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세례성사, 성체성사 그리고 (비록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고해성사만을 성사로 인정하였다.


  1519년 11월 로마에서는 루터에 대한 심문이 재개되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Exsurge Domine로 시작하는 파문 위협 칙서 – 물론 이 칙서는 루터를 겨냥하고 있었다 – 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루터의 저서 가운데 41개의 명제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이 칙서를 비텐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1512년 1월 3일 루터를 파문하였다. 1521년 4월 17일과 18일 보름스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루터는 다시금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관련해서 황제 칼 5세는 1521년 4월 19일 자신은 신앙과 교회를 옹호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1521년 5월 26일 황제 칼 5세는 이른바 「보름스 칙령」에 서명하였다. 이 칙령은 3년 전부터 등장한 오류는 이미 교회로부터 단죄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황은 루터로 하여금 스스로 이단을 철회하도록 부단하게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이가 대사 칙령의 실천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보름스 칙령」은 관철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루터의 주장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확산될 수 있었다.


  1512년 11월 17일에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자신의 특사로 프란체스코(Francesco Chieregati)를 파견하였다. 12월 10일에는 루터 문제를 다루었다. 이 기회에 교황의 특사 프란체스코는 교황은 자신에게 오류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할 과제를 부여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1523년 1월 3일 프란체스코는 교황의 교서를 낭독하였다. 교항의 교서는 루터의 오류와 교회의 분열을 단죄하였으며, 동시에 교황청의 공동 책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하지만 교황의 교서는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제국 의회에 참석하였던 독일의 제국 의회의 의원들은 1523년 2월 5일 루터를 겨냥한 일련의 조치들은 매우 심각한 동요를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교회의 개혁과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교회의 개혁과 관련해서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루터의 주장은 더욱더 확산되었다. 루터의 주장이 널리 확산된 이면에는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던 루터의 성서 번역도 한몫을 거들었다. 아울러 그 당시 독일에서 루터의 주장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회적 동요, 이른바 ꡐ농민 전쟁ꡑ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농민들에 제기하였던 요구 중에는 복음에 대한 자유로운 설교와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하였던 설교가들의 석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터는 봉기한 농민들로부터 등을 돌려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ꡐ미친 개ꡑ처럼 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농민들의 참패는 국민 운동으로서의 새로운 가르침의 종말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루터는 새로운 가르침을 겨냥한 저항을 저지시키고, 미사의 거행을 방해하는 것이 영주들의 임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영주들은 교회 내에서 파수꾼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후임자 클레멘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즉시 독일에서의 신앙 분열 문제를 자신의 재임 중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1월 8일 독일에 파견할 특사로서 추기경 로렌초(Lorenzo Campeggio)를 임명하였다. 1524년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교황 대사 지롤라모(Girolamo Rorario)는 교황의 특사 로렌초의 방문을 공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의회 의원들은 거듭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 1526년 8월 27일 슈파이어(Speyer)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의원들은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각자 자신의 양심과 황제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로써 「보름스 칙령」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가 1530년 4월 8일 소집하기로 공고하였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서 신앙의 문제와 관련해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가톨릭 의원들과 개신교 의원들 사이의 합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신교의 의원들은 황제의 위임에 의해 마련된 「아우크스 부르크의 신앙 고백」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항제는 공의회의 소집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서 「보름스 칙령」이 다시금 회복되었다. 1530년 10월 30일 황제는 교황에게 일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통지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후임자 바오로 3세는 자신의 교황 즉위 후 즉시 공의회의 소집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1536년 공의회는 만토바(Mantua)에서 소집된다고 발표되었으나, 1537년에는 비첸차(Vicenza)에서 소집된다고 수정 발표되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공의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개신교의 영주들은 공의회 참석 초대를 거부하였다. 가톨릭의 주교들도 공의회의 참석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에 공의회는 두 차례에 걸쳐 연기되다가, 1539년에 이르러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서 황제 칼 5세는 종교 대화를 통해 일치를 얻어내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154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있었던 대화에서는 대단한 어려움이 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황제는 1541년 9월 독일 제국 내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어야 한다는 제국 의회의 의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공의회 개최 장소로 트리엔트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1542년 11월 1일자로 공고되었던 공의회의 소집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1542년 여름부터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소집 일자로 1545년 3월 15일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 교황의 특사 이외에 추기경 델 몬테(Del Monte), 체르비니(Cervini) 그리고 폴레(Pole)의 대리 참석자가 트리엔트에 부재중이었으므로 공의회는 1545년 12월 13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막될 수 있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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