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의 구성요소

 

새 고해성사 예식서는 고해성사의 본질적 요소들을 참회, 죄고백, 보속, 사죄(6항)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가 범죄한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고해성사를 받으려 할 때에는 먼저 마음을 대해서 하느님께로 회두해야 한다.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활의 결심을 내포하는 이 깊은 회심은 교회에 고백하고 마땅한 보속을 하고 생활을 개선함으로써 표현된다.


고해성사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표시하고 이루어진 은총을 뒷받침해 주는 물리적 질료(물, 기름, 빵등)가 없어서 이 성사의 성사성을 돋보이게 하는 상징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인간자체가 상징이다. 고해자의 행위들은 성사의 구성요소이며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르친대로 성사의 “질료”(materia)이다. 은총을 받았는데도 은총을 임의로 포기하고 거부하여 교회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신자는 회개하고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엄밀히 말해서 고해성사의 질료는 고해자의 행위라기 보다는 St.Thomas Aqunas가 말한대로 죄인인 신자, 회개하는 신자, 용서를 빌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바치친 보상에 참여하는 신자의 신분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은 고해성사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빠스카 신비를 새롭게 체험하게 된다.


1) 통회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 중의 첫째는 통회이니 범한 죄에 대한 아픔과 미움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겸한 마음의 자세이다”(6-a항) 통회는 참회자의 진실성과 회개의 진정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에 은총이 없이는 후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은총을 대전제해 놓고 통회의 성격을 따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을 상대적인 차원에 묶어두고 하느님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회를 성취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는 참된 통회를 방해한다. 통회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다.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뉘우치면서 체험하는 자기 아픔이다.


역사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결코 단절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에 얽매어 있다. 인간은 통회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자유로이 행했던 행위를 부정한다. 이 부정은 과거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행위에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아니하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재로 망각해 버릴 수는 없다. 과거는 현재에 속하는 하나의 계기로 남아서 미래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미래를 선취해 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과거의 실재를 거부할 수 없는 한 과거의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사랑안에서 인간의 과오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께 조건없이 전향해야 할 통회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참된 통회는 하느님과의 재회를 실현시키는 것이고 이 재회는 인간의 구원을 주도하시며 인간을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사업의 협력자로 부르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참회의 성사를 받기 위해서 하등통회, 즉 불완전한 통회로 족하다고하였다. 이 불완전한 통회는 죄의 거부와 죄인을 위협하는 영벌과 다른 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 이 불완전한 통회는 하느님과 일치를 위해서 인간을 준비시켜 주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오직 사랑의 도움을 받아 보다 완전한 회개의 은총을 받도록 준비 시키는데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 은총으로써 완전한 통회를 하도록 도와준다.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상등통회를 하는 자에게 죄를 풀어주신다. 그렇다면 고해성사에 임하는 고해자 중에 이미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총상태에 놓여 있는 자들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상등통회는 성사를 받을 원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와의 화해가 하느님과의 화해의 표시요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총과 신앙이 기분과 감정과는 상관없기 때문에 참된 통회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통회는 신학적인 이유보다 심리적인 이유로 인해 객관성이 희박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회는 우리들을 하나씩 이름불러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여 감정이 아니라 죄를 역겨워하는 자유의지의 결단을 요구한다.


2) 고백


통회를 올바로 알아들으면 그것이 곧 하느님 대전에서 행하는 고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고백은 없어도 하느님께서 내 속마음을 모두 아시고 꿰뚫어 보신다는생각으로 만족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을 필요로 하는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자기 죄를 하느님 대전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악이기에 배척해야 마땅하며 그런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죄의 고백에 대한 의미를 묻는 것은 결국 죄의 고백에 대한 목적을 묻는 것일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목적은 역시 회개이다. 회개는 단순히 의견의 수정이 아니라 삶의 철저한 전향이다. 이기주의적인 아집으로부터 탈피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믿음으로 전향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의 고백은 신앙의 고백이다.


죄의 고백은 성사적 표지의 본질적 요소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회개의 본질이라고 해야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를 구원의 장소로서,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가견적 표지로서 수락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이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또 여가적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도 수락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죄의 고백으로써 자신의 생활에 대한 하느님 말씀의 판결을 수락하는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에 의해서 당신의 집전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의 판결을 수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중대한 결정, 즉 근본적인 선택(대죄의 문제)에 있어서 홀로 이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공동체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서 용서를 찾아야 하고 이 말씀의 판결을 기꺼이 수락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잘못(소죄)도 고백하도록 교회는 크게 장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기적으로 소죄도 고백하는 것은 양심을 기르고 나쁜 성향과 싸우며,리스도를 통해 치유받고, 성령의 생명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성부의 은총을 더욱 자주 받으며 성부와 같이 자비로워지도록 힘을 얻는다.


(3) 보속


죄에 대한 뉘우침(통회)과 자기 고백만으로 참된 회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죄를 통해 야기된 손실을 보상하겠다는 속죄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속죄행위는 회개의 열매이고 마무리 지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와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죄의 고백과 뉘우침을 통해 이기주의의 장벽을 뛰어넘고 하느님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역사적 행위의 과오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이 과오는 속죄행위를 통해 속죄되어질 수 있다. 죄스런 과거는 부단한 속죄행위와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희망안에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속죄되어질 수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고해 성사가 죄에서 오는 잠벌을 모두 없애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죄의 결과는 인간이 회개한 후에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한 후에도 완전히 개선되지않은 죄의 습성, 불의를 조성한 상황, 죄인의 안팎에 남아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보속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표지이다.


고백자의 이같은 보속행위는 과거를 반성하면서 미래의 개선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이같이 고백자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새로이 구원의 신비 속에 잠가버리며 미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예식서 6-c항).


이와같이 보속은 두가지 관점에서 부과된다. 하나는 과거에 범한 과실에 비례되는 것으로 이미 용서는 받았으나 지금 그것을 보상하기 위함이고, 하나는 앞을 내다보고 주는 보속으로서 앞으로 가장 열심히 행동하는 길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속죄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항구하고 과감한 노력이야말로 정말 뜻깊은 속죄라 하겠다. 목적없는 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동의함으로써 행하는 속죄요, 인간본성의 모든 영역과 충동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에 몰입함으로써 행하는 속죄이다.


고해 사제는 고해하는 사람에게 보속을 줄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보속은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에 맞아야 한다.


고해자의 환경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성경을 읽는 것을 보속으로 줄 수 있다. 사실 하느님 말씀보다 더 힘있는 것이 없을 것이기에 새 예식서에 보면 고백자를 맞이한 후 하느님 말씀을 낭독하는 부분이 있다. 교회는 보속하는 방법을 시대에 따라 변화시켜 왔으니 현대인에게 유효한 보속방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4) 사죄


예식서를 보면 사죄경은 첫부분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해내신 구원업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사죄경의 신학적 설명은 예식서 19항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사죄경은 고해자의 화해가 성부의 자비로우심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죄인의 화해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사죄를 위한 성령의 임무를 강조하고, 마침내 고해성사의 교회적 측면을 밝히고 있으니, 교회의 봉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화해가 주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라틴 교회에서는 고해성사에서 사죄경은 기원형식과 선언형식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11세기까지는 전 교회에서 기원형식을 사용하였다. 사실 교회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화해라고 불렀지 사죄라고 부르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해서 사죄를 직설적으로 표현했으나 기원적 형식은 이것이 전체 교회의 기도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동방교회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기원형식을 사용한다. 만일 이 형식이 교회의 권한 행사를 나타내는 것이면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원형식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내용의 사죄경문이다. 만일 라틴 교회에서 이런 형식을 사용한다면 사죄는 무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해성사는 예식서 6항-b에서 말하고 있듯이 ‘판결’의 형식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판사인 사제는 기원적인 말로 고백자에게 선고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제의 이 판결행위는 고백자를 환영하여 교회 공동체와 다시 화해시켜 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성사집전자의 이 판결은 고백자의 회개를 공식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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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의 구성요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새 고해성사 예식서는 고해성사의 본질적 요소들을 참회, 죄고백, 보속, 사죄(6항)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가 범죄한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고해성사를 받으려 할 때에는 먼저 마음을 대해서 하느님께로 회두해야 한다.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활의 결심을 내포하는 이 깊은 회심은 교회에 고백하고 마땅한 보속을 하고 생활을 개선함으로써 표현된다.

    고해성사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표시하고 이루어진 은총을 뒷받침해 주는 물리적 질료(물, 기름, 빵등)가 없어서 이 성사의 성사성을 돋보이게 하는 상징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인간자체가 상징이다. 고해자의 행위들은 성사의 구성요소이며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르친대로 성사의 “질료”(materia)이다. 은총을 받았는데도 은총을 임의로 포기하고 거부하여 교회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신자는 회개하고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엄밀히 말해서 고해성사의 질료는 고해자의 행위라기 보다는 St.Thomas Aqunas가 말한대로 죄인인 신자, 회개하는 신자, 용서를 빌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바치친 보상에 참여하는 신자의 신분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은 고해성사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빠스카 신비를 새롭게 체험하게 된다.

    1) 통회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 중의 첫째는 통회이니 범한 죄에 대한 아픔과 미움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겸한 마음의 자세이다”(6-a항) 통회는 참회자의 진실성과 회개의 진정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에 은총이 없이는 후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은총을 대전제해 놓고 통회의 성격을 따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을 상대적인 차원에 묶어두고 하느님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회를 성취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는 참된 통회를 방해한다. 통회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다.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뉘우치면서 체험하는 자기 아픔이다.

    역사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결코 단절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에 얽매어 있다. 인간은 통회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자유로이 행했던 행위를 부정한다. 이 부정은 과거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행위에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아니하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재로 망각해 버릴 수는 없다. 과거는 현재에 속하는 하나의 계기로 남아서 미래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미래를 선취해 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과거의 실재를 거부할 수 없는 한 과거의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사랑안에서 인간의 과오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께 조건없이 전향해야 할 통회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참된 통회는 하느님과의 재회를 실현시키는 것이고 이 재회는 인간의 구원을 주도하시며 인간을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사업의 협력자로 부르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참회의 성사를 받기 위해서 하등통회, 즉 불완전한 통회로 족하다고하였다. 이 불완전한 통회는 죄의 거부와 죄인을 위협하는 영벌과 다른 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 이 불완전한 통회는 하느님과 일치를 위해서 인간을 준비시켜 주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오직 사랑의 도움을 받아 보다 완전한 회개의 은총을 받도록 준비 시키는데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 은총으로써 완전한 통회를 하도록 도와준다.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상등통회를 하는 자에게 죄를 풀어주신다. 그렇다면 고해성사에 임하는 고해자 중에 이미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총상태에 놓여 있는 자들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상등통회는 성사를 받을 원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와의 화해가 하느님과의 화해의 표시요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총과 신앙이 기분과 감정과는 상관없기 때문에 참된 통회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통회는 신학적인 이유보다 심리적인 이유로 인해 객관성이 희박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회는 우리들을 하나씩 이름불러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여 감정이 아니라 죄를 역겨워하는 자유의지의 결단을 요구한다.

    2) 고백

    통회를 올바로 알아들으면 그것이 곧 하느님 대전에서 행하는 고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고백은 없어도 하느님께서 내 속마음을 모두 아시고 꿰뚫어 보신다는생각으로 만족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을 필요로 하는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자기 죄를 하느님 대전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악이기에 배척해야 마땅하며 그런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죄의 고백에 대한 의미를 묻는 것은 결국 죄의 고백에 대한 목적을 묻는 것일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목적은 역시 회개이다. 회개는 단순히 의견의 수정이 아니라 삶의 철저한 전향이다. 이기주의적인 아집으로부터 탈피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믿음으로 전향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의 고백은 신앙의 고백이다.

    죄의 고백은 성사적 표지의 본질적 요소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회개의 본질이라고 해야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를 구원의 장소로서,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가견적 표지로서 수락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이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또 여가적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도 수락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죄의 고백으로써 자신의 생활에 대한 하느님 말씀의 판결을 수락하는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에 의해서 당신의 집전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의 판결을 수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중대한 결정, 즉 근본적인 선택(대죄의 문제)에 있어서 홀로 이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공동체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서 용서를 찾아야 하고 이 말씀의 판결을 기꺼이 수락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잘못(소죄)도 고백하도록 교회는 크게 장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기적으로 소죄도 고백하는 것은 양심을 기르고 나쁜 성향과 싸우며,리스도를 통해 치유받고, 성령의 생명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성부의 은총을 더욱 자주 받으며 성부와 같이 자비로워지도록 힘을 얻는다.

    (3) 보속

    죄에 대한 뉘우침(통회)과 자기 고백만으로 참된 회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죄를 통해 야기된 손실을 보상하겠다는 속죄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속죄행위는 회개의 열매이고 마무리 지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와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죄의 고백과 뉘우침을 통해 이기주의의 장벽을 뛰어넘고 하느님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역사적 행위의 과오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이 과오는 속죄행위를 통해 속죄되어질 수 있다. 죄스런 과거는 부단한 속죄행위와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희망안에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속죄되어질 수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고해 성사가 죄에서 오는 잠벌을 모두 없애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죄의 결과는 인간이 회개한 후에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한 후에도 완전히 개선되지않은 죄의 습성, 불의를 조성한 상황, 죄인의 안팎에 남아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보속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표지이다.

    고백자의 이같은 보속행위는 과거를 반성하면서 미래의 개선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이같이 고백자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새로이 구원의 신비 속에 잠가버리며 미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예식서 6-c항).

    이와같이 보속은 두가지 관점에서 부과된다. 하나는 과거에 범한 과실에 비례되는 것으로 이미 용서는 받았으나 지금 그것을 보상하기 위함이고, 하나는 앞을 내다보고 주는 보속으로서 앞으로 가장 열심히 행동하는 길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속죄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항구하고 과감한 노력이야말로 정말 뜻깊은 속죄라 하겠다. 목적없는 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동의함으로써 행하는 속죄요, 인간본성의 모든 영역과 충동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에 몰입함으로써 행하는 속죄이다.

    고해 사제는 고해하는 사람에게 보속을 줄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보속은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에 맞아야 한다.

    고해자의 환경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성경을 읽는 것을 보속으로 줄 수 있다. 사실 하느님 말씀보다 더 힘있는 것이 없을 것이기에 새 예식서에 보면 고백자를 맞이한 후 하느님 말씀을 낭독하는 부분이 있다. 교회는 보속하는 방법을 시대에 따라 변화시켜 왔으니 현대인에게 유효한 보속방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4) 사죄

    예식서를 보면 사죄경은 첫부분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해내신 구원업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사죄경의 신학적 설명은 예식서 19항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사죄경은 고해자의 화해가 성부의 자비로우심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죄인의 화해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사죄를 위한 성령의 임무를 강조하고, 마침내 고해성사의 교회적 측면을 밝히고 있으니, 교회의 봉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화해가 주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라틴 교회에서는 고해성사에서 사죄경은 기원형식과 선언형식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11세기까지는 전 교회에서 기원형식을 사용하였다. 사실 교회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화해라고 불렀지 사죄라고 부르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해서 사죄를 직설적으로 표현했으나 기원적 형식은 이것이 전체 교회의 기도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동방교회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기원형식을 사용한다. 만일 이 형식이 교회의 권한 행사를 나타내는 것이면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원형식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내용의 사죄경문이다. 만일 라틴 교회에서 이런 형식을 사용한다면 사죄는 무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해성사는 예식서 6항-b에서 말하고 있듯이 ‘판결’의 형식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판사인 사제는 기원적인 말로 고백자에게 선고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제의 이 판결행위는 고백자를 환영하여 교회 공동체와 다시 화해시켜 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성사집전자의 이 판결은 고백자의 회개를 공식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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