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 교황의 유배 Avignon

 아비뇽 – 교황의 유배  ~敎皇의 流配  Avignon

  교황 베네딕토 9세 서거 후 , 후임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 회의가 페루자(Perugia)에서 소집되었다. 추기경단은 친프랑스파와 친이탈리아파로 갈라졌다.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 회의는 11개월간 지속되었다. 드디어 프랑스권 출신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약 70여 년간이나 지속되었던 이른바 아비뇽의 교황 유배의 서막을 올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곧 프랑스 국왕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유순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가는 여행을 준비는 하였으나 교황 즉위식을 위해서 추기경들을 리옹으로 초대하였다. 이로써 추기경들에게 로마로 귀환하겠다고 한 약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로마 귀환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이면에는 로마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정치적 상황도 작용하였다. 그래서 1309년 이래 교황은 아비뇽에 주재하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 서거 후 교황 선출을 위해 소집된 추기경단 비밀 회의는 2개월간 계속되었다. 추기경단 비밀 회의는 17명의 프랑스권 출신 추기경과 7명의 이탈리아권 출신 추기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권 출신의 추기경 숫자가 많았던 이유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자신의 교황 재임시 자국민 가운데서 추기경을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 회의는 이탈리아권 출신 추기경들을 위협하면서 해산하였다. 그래서 2년 후 다시금 리옹에서 추기경단 비밀 회의가 소집되었고, 1316년 8월 7일에 요한 2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22세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다. 이 선거에서도 프랑스 출신 동향인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작용하였다.


  리옹에서 교황 즉위식을 마친 후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교황이 아비뇽에 계속 머물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 요한 22세는 로마로 귀환을 원했지만 추기경들의 요청에 따라 아비뇽에 머물기로 하였다. 1334년 12월 4일 교황 요한 22세는 별세했고, 같은 해 12월 20일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던 베네딕토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2세 역시 로마로부터 파견된 사절들에게 멀지 않아 로마로 귀환하리라는 것을 암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재위 초기부터 아비뇽에 요새에 버금가는 교황 궁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의 후임자 클레멘스 6세 –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남부 지방 출신이었다 – 는 1342uss 5월 7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6세의 후임자 인노첸시오 6세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다. 인노첸시오 6세 교황은 로마 귀환을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별세하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6세 교황의 후임자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근교 지역의 출신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5세 역시 로마 귀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다. 특히 성녀 비르지타(Birgitta)가 교황에게 로마로의 귀환을 청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과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로마로 귀환하려는 교황의 계획을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67년 4월 30일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을 출발하여 10월 16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가 안고 있던 내적인 어려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1370년 가을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비뇽으로 되돌아갔다. 교황은 9월 27일에 아비뇽에 도착하였다. 아비뇽 도착 2개월 후 교황은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로는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1372년부터 로마 귀환을 거듭 예고했고, 1376년 가을에 로마 귀환길에 올랐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1376년 9월 13일, 13명의 추기경들과 함께 아비뇽을 출발하여 로마에 성대하게 입성하였다. 나머지 교황청 기구들의 로마 귀환은 1377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으로 별세하였다. 교황들의 아비뇽 체류는 거의 70년간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성서를 인용하여 교황의 ꡐ바빌론 유배ꡑ라고 불렀다. 교황의 아비뇽 유배를 가능케 한 원이으로는 프랑스 국왕에게 지나치게 종속되었던 교황의 입장, 프랑스 출신들이 교회의 주요 직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했던 제도, 그리고 교황들의 재정적인 궁핍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