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투쟁 文化鬪爭 Kulturkampf
ꡐ문화 투쟁ꡑ이라는 단어는 19세기의 프로이센과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국가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갈등과 대결을 지칭한다. 프로이센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갈등과 대결은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비스마르크(Bismarck)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제들과 신자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주교들의 정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사제들과 공동체들을 후원하였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중앙 집권제에 저항하는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과 중앙 집권제를 옹호하는 정치가 빈트토르스트(Windthorst)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울러 세계관적인 관심사와 정치적인 관심사도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 집권제에 입각한 독일 제국의 이념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위협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일련의 법률 개혁 조치를 통해 교회의 영향을 차단시키려고 모색하였다. 이러한 모색의 배경에는 교회가 스스로 생명력을 상실했으면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부 내의 가톨릭 담당 부서의 폐지(1871년), 설교 조항의 폐지(1871년), – 이 조항은 성직자가 자신의 직무 수행에 있어서 국가의 공적인 관심사에 평화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도전할 경우 2년의 투옥 또는 금고의 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예수회와 관련된 법률(1872년), – 예수회와 유사한 수도회의 해체 및 그 구성원의 추방 – 악명 높은 5월법(1873년), – 교회를 적대시하는 정신에 입각한 성직자의 양성과 교육 그리고 교회의 순치를 규정하는 법으로서, 이 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고액의 벌금형과 투옥의 처벌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학교 감독법, – 전체 학교는 물론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오로지 국가가 행사한다는 내용 – 이른바 봉쇄법(1874년)과 빵 광주리 법(1875년), – 교회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의 중단 – 바티칸에 거주하는 프로이센 사절의 폐지 그리고 병자 간호에 기여하지 아니하는 수도회의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1878년의 경우 단지 1/3에 해당하는 주교좌만이 존속하는 정도에 그쳤다. 포젠(Posen)과 쾰른(Köln)의 대주교와 브레슬라우(Breslau), 뮌스터(Münster), 림부르크(Limburg), 파더본(Paderborn)의 주교들은 퇴위당하였다. 케틀러(Ketteler) 주교의 서거로 공석이 된 마인츠의 주교좌는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고,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1,000개 이상의 본당은 정상적인 사목자들을 모시지 못하였고, 100여 명 이상의 사제들이 추방당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를 적대시하는 정신에 입각해서 제정된 법률의 무효를 주장하고, 이러한 법률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교황 비오 9세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투쟁의 핵심은 빈트토르스트(Windthorst), 말린크로트(Mallinkrodt) 그리고 라이헨슈페르거(Reichensperger) 형제를 지도자로 하는 중앙 집권제였다. 가톨릭 교회의 저항은 비스마르크와 그의 조언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독일 내부의 여러 가지 정치적 사안은 중앙으로부터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을 보장받아 투쟁을 끝내는 방향을 모색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과 대결은 고도의 외교적 재능과 수완을 겸비하였던 교황 레오 13세의 등장으로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드디어 뮌헨과 비엔나에서 비스마르크와 교황 대사 사이에 예비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 회담은 문화 투쟁 법령을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문화 투쟁으로 입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쇄신되기 시작하였고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